[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6>개항장 인천의 외국상사(商社)들
▲ 청관
▲ 세창양행숙사
인천이 개항하기 전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8월 조청상민무역장정이 체결되고 이어서 서양 여러 나라와도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1883년 개항한 인천에는 중국과 일본에 진출해 있던 유럽과 미국계 상사들이 상륙해 사업을 펼칠 수 있었는데,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소규모 상점과는 달리, 자본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했고 사업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도 그들보다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일본 상인의 등장
인천의 개항 이후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부터 인천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이해 12월 인천의 일본인은 348명으로 그 중 상인은 21명이었다. 일본상인은 주로 무역상, 잡화상, 객주업, 운송업 등에 종사했다. 영국산 면제품을 중계무역해 조선에 수입하고 조선의 곡물을 일본에 수출했다. 일본으로의 곡물수출은 일본의 쌀부족 때문에 점차 확대돼 갔고, 그래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곡물유통권이 형성됐다. 나아가 인천항에 진출한 일본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교통망과 금융 시스템도 갖춰졌다. 1883년 4월에는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 인천지점이 설립되고, 11월 일본 도쿄의 제일은행에서 부산포지점의 출장점을 인천에 개설해 일본상인의 금융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1890년 10월에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제18은행에서 인천지점을 개설하고, 일본 오사카(大阪)의 제58은행에서도 인천지점을 개설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일본상인들의 무역활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었다.

청관의 탄생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던 청국은 오히려 일본보다 한해 늦은 1884년 4월이 돼서야 조계를 설치했다. 인천에 처음 정착하게 되는 중국인은 초기 5명 정도로, 인천세관 뒤편에 거주하면서 식료품, 잡화류의 수입과 해산물의 본국 수출을 주업으로 하는 한편, 영국, 미국, 러시아 각국의 함선이 입항했을 때 식량과 용수의 공급을 도모하는 등의 업무를 개시했다. 1888년 인천과 상하이의 정기항로 개설과 더불어 많은 중국인들이 오가는 상황 하에 인천의 청관이 탄생하게 됐다. 당시 인천의 의생호(義生號)는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조선의 총지점으로 1910년에는 한성, 부산, 목포에 지점을 설치해 서구의 잡화, 양주, 식료품, 화장품 및 중국산 직물과 잡화 등의 도매와 소매를 했던 역사 깊은 상점이었다. 또 잘 알려진 무역상사 동순태(同順泰)도 한성과 상하이를 잇는 무역업을 벌이고 있었다. 화교 중에는 농업경영에 앞장서는 인물 즉, 통역관 우리탕(吳禮堂)과 그가 경영하는 농원도 등장했다.

서양상사의 진출
한국에 제일 먼저 진출한 서양의 상사는 1883년 영국계 이화양행(怡和洋行)이었다. 이화양행은 1832년 영국의 윌리엄 자딘(Jardine)과 그의 대학 후배인 제임스 매티슨(Matheson)이 중국 광저우에 설립한 상사로, 현재까지도 홍콩에서는 유력한 재벌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화(怡和)는 '행복한 조화'라는 뜻이었지만 중국의 아편전쟁(1839~42)에 개입했다는 어두운 역사로부터 출발했다. 이화양행의 조선 진출은 청나라의 추천으로 조선의 고문관이 된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화양행은 우피(牛皮)무역에 종사하면서 청국 초상국(招商局) 소속 660t 급의 기선 '남승호'(南陞號)를 투입해 나가사키(長崎)와 부산을 경유해 인천과 상해를 연결하는 한국 최초의 정기 항로를 개설하고, 광산채굴권을 획득코자 했다. 부업으로 보험회사의 대리점 역할도 겸했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 보험업의 시작이었다. 정기선 운항은 1년간의 계약이 만료되자 누적된 운항 결손으로 중단했고, 1884년 11월에 이르러서는 영업부진으로 인해 조선에서 철수했다. 그들의 내한 목적은 교역 보다는 처음부터 광산채굴권에 있었다. 조선에서의 광산 개발은 본격적 개발이 이뤄지지 않던 그야말로 '노다지(No Touch)' 상태였던 것이다. 1896년 제물포에 지점을 낸 영국선박회사 홈링거양행이나, '존스톤별장'의 존스톤도 이화양행과 무관치는 않다.

미국 상사의 진출도 두드러졌다. 모스·타운센드상회는 1884년 5월 일본 미국무역상사 조선지점으로 인천항에서 출발했다. 1883년 고종의 지시를 받은 김옥균은 요코하마의 미국무역상사를 찾아가 모스와 차관교섭을 시도했는데, 이듬 해 4월 울릉도삼림벌채권 양도계약을 체결한 뒤 모스는 타운센드를 조선의 지점장으로 파견해 회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1885년 초 타운센드는 인천의 순신창상회를 인수하고, 한국인 객주와 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하기도 했는데, 1888년 이래 무기를 구입해 조선정부에 납품하면서 면세혜택까지 받았다. 1892년부터는 증기력을 응용한 타운센드정미소를 설립 운영했다. 타운센드는 1896년 인천 월미도에 약 50만t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짓고 1897년 3월 미국의 거대석유기업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독점판매권을 획득했다. 또한 1900년 율도에 폭약창고를 건설해 세창양행과 함께 폭약을 공급하기도 했다.

가장 오랫동안 두드러진 활동을 남긴 것은 독일계 세창양행이었다. 세창양행은 1884년 6월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 상사로 마이어(Meyer)와 볼터(Wolter)의 합작회사였다. 당시 조선의 외교·통상·관세·재정을 주도하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긴밀한 협조 아래 경제권을 확장시켜 나갔다. 세창양행은 독일산 바늘, 염료, 금계랍(金鷄蠟:키니네),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했고, 조선산 쇠가죽, 쌀, 콩 등을 수출했다. 얇고 견고한 세창 바늘은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해열 진통제인 금계랍은 학질 치료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고 선전했기 때문에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광고'를 통해 회사의 인지도를 높였던 관계로 '세창'이라는 상표는 조선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세창양행의 주요한 수입원은 차관, 선박운송, 기술자 초빙, 광산권 개발 등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대규모 이권 사업이었다. 서울과 인천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볼터는 '제물포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세창양행은 이름자 그대로 '영원한 번창'을 누리려 했었으나 6·25전쟁 발발로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