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7.갑문항
일제 식민지 침탈 가속 방편 시설
▲ 인천항 갑문을 증기선이 통과 중이다. 앞쪽에 월미도, 오른쪽에 갑문관리소가 보인다.
근래에 보기 드문 한파가 내습했다.

기온이 급강하할 때면 온몸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인천항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종종 있었다.

광복 이후 1947년 2월3일, 1963년 1월24일, 1976년 2월1일, 1984년 2월5일 한파로 인천 앞바다가 꽁꽁 얼어붙어 항로를 폐쇄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난 2011년 1월16일 기온이 영하 17도까지 뚝 떨어져 연안부두 여객터미널 앞바다에 얼음장들이 뒤엉킨 냉랭한 침묵의 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내항의 결빙과 유빙(流氷) 사고보다 더 큰 인천항의 난점은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큰 데 있다.
개항 직후 인천이 항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지금의 중구 항동 일대에 석축을 쌓아 만조 때 배가 쉬 닿을 수 있도록 선착장을 마련하고 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거룻배는 몰라도 큰 기선들이 정박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 초보적 시설이었다.

1906년 인천항이 지닌 근원적 애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독(Dock) 건설이 시작되었다.

'축항(築港) 건설'이라는 이름 아래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천감리서에 수감됐던 백범 김구 선생이 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했다는 서글픈 얘기가 '백범일지'에 있다.

'독'과 그 출입문인 '갑문'은 말할 것도 없이 식민 침탈을 가속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설계, 시공한 항만 시설물이었는데, 국내 유일의 갑문항으로서 기록되고 있다.

그 시절, 그 같은 기술과 자본을 대거 투입했다는 것은 일제의 야욕이 얼마나 집요했던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공사는 장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11년 6월11일 총공사비 566만원을 들여 갑문 공사를 해 1918년에 준공했다.

'갑문'은 두 군데의 철제문으로 된 '이중식'이어서 조수 간만의 차가 커도 출입이 자유로웠고, '독'은 4,500톤 급 5척을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인천서 열린 '개항 50주년 기념식'에서 이등박문은 이를 '제국의 위업'이라며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 오욕의 역사를 말끔히 씻어낸 것은 1974년 '인천항 내항 전면 독'을 완성한 후였다.

그로써 인천항은 인천 발전의 축인 '트라이 포트'의 하나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