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5.해관
인천 관세행정 출발지·관광 적지
▲ 초창기 '인천해관'(사진 중앙 오른쪽 기와집) 전경. 지금의 중구 파라다이스호텔 일대이다.
인천시가 '관광 활성화'를 위해 추진했던 시내 면세점 유치가 불발됐다고 한다.

관세청이 "아직 외래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지 않고 있고, 타 지역에 비해 시내 면세점에 대한 필요성이 높지 않아 다음에 다시 신청하라."는 입장을 시에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울 3곳, 제주 1곳 등 4곳을 추가 설치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이는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해외 관광객의 추세를 감안하지 않는 지역 푸대접이자, 인천이 해관(현 세관)의 탄생지라는 역사적 기득권을 감안치 않은 처사로 보인다.

해관은 개항 직후 일본과 맺은 불평등조약에 따른 '무관세 무역'을 시정하는 한편, 주권 국가로서 관세권 회복을 위해 1883년 6월16일에 문을 열었다.

현 중구 북성동 파라다이스 호텔 동편에서 업무를 개시했고, 이어서 원산, 부산에도 각각 설치됐다.

초대 세무사(현 세관장)는 영국인 스트리 플링이었다.

정부가 관세 행정에 어두웠기에 청국의 이홍장이 추천한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전권을 맡긴 데 따른 결과였다.

해관은 청국의 우표를 소위 '해관 우표'라면서 사용하는 등 청국의 영향 하에 있었다.

1894년까지 청국해관에서 파견한 외국인들이 업무를 맡았고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 5도를 관할구역으로 두었다.

1897년 10월엔 목포와 진남포에 인천해관지소를 설치해 전국을 관리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후에는 명칭을 '세관'이라 바꿨다.

그 무렵 '제물포항'에는 청국, 일본, 러시아를 위시해 영국, 독일, 미국, 이태리 등 열강의 기선과 군함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행가 샤를 바라, 영국왕실지리학회의 학자 엘리자베드 비숍 등은 당시 인천의 풍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듯 인천은 우리나라 관세행정의 출발지이자, 지금도 인천항,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관광 적지이다.

그를 충족시킬 기본 인프라일 '시내 면세점', '대단위 쇼핑몰' 같은 시설이 요긴한 마당에 관세청이 제 뿌리도 잊은 채 이를 외면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