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3.도서관
▲ 세창양행의 천연색 상표. 개항기 조선의 전통 혼례를 소재로 한 것이 이채롭다.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오늘 우리는 '광고'의 홍수 속에 산다.

공중파 TV, 케이블 채널, 라디오, 신문, 잡지, 간판, 전광판, 버스와 전철 등의 공세로 인해 눈과 귀가 모자랄 형편이다.

심지어는 잠재의식에까지 침투당해 'CM 송'을 '가요'처럼 즐겨 부르는 세대까지 탄생했다.

그러나 '광고'의 본령은 원래 부정적인 게 아니었다.

대중전달의 수단이 없거나, 부족했던 시절에는 정보를 널리 전하는 훌륭한 매개체요, 한 시대의 사회상이나 정신을 직ㆍ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대중예술'의 차원으로까지 승화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무역상사로 군림했던 인천의 '세창양행' 첫 광고도 그랬다.

잔존량이 얼마 되지 않는 세창양행의 시계, 바늘, 금계랍, 물감 광고 등을 보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개항기의 풍물과 지역정서 혹은 신문물을 대했던 시대상을 읽을 수가 있다.

신문물에는 벼라별 게 다 있었다. 자명종, 회중시계, 요지경(Peep Show), 뮤직 박스를 비롯해 호박, 유리, 각종 램프, 서양의 단추, 직물, 천, 약품 등이 들어왔고, 호랑이 등 각종 짐승의 가죽과 갈기털, 사람의 머리카락, 옛 동전 등을 내다 팔았다.

1886년 2월22일자 '한성주보(漢城週報)'에 실린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 우리나라 광고의 효시인데, 이 중국식으로 '고백(告白)'이라 한 '광고'는 사진, 그래픽 등 시각적 효과는 깡그리 무시한 채 긴 문장으로만 상품을 소개했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이나 수준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상품 선전에 도전했던 셈이긴 하나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판매하오니 모든 귀한 손님과 선비와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은 오늘과 다를 바가 없다.

그 후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된 것은 1896년 창간한 독립신문부터였고, 진정한 의미에서 지역의 광고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0월7일 최초의 지역지이자 인천일보의 뿌리인 순 한글판 신문 '대중일보'가 창간되면서부터였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