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21>영종도에서의 절대 궁핍과 안분(安分)
배고픔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추위가 겹쳐지면 그 고통은 더욱 크기 마련이다.
 
 ……(중략)
 豆粥支頤解疫瘡(두죽지이해역창) 콩죽으로 삶을 이어가며 부스럼을 다스리려 하지만
 頑飢未展寒蚯結(완기미전한구결) 주린 육신 펴지도 못하는데 추위는 지렁이처럼 찾아오고
 煖響空空瘠鴠腸(난향공공척단장) 따뜻한 소식 들려오지 않고 징경이 뱃속은 여위어만 가네
 
 제목이 「임자년 동지(壬子冬至)」이다. 밤이 가장 길고 추위가 절정에 이르는 동짓날에 느끼는 배고픔은 남다른 고통이다. 콩죽으로 연명하며 부스럼을 견뎌내는 일도 버거운데, 추위는 지렁이처럼 스멀거리며 찾아온다고 한다. 온전히 섭생을 해야 추위에 맞설 수 있지만 창자가 비어 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유사한 상황은 '급한 바람 타고 내리는 비에 극심한 추위/구휼한다 한들 굶주린 백성 태반이 죽었(急風乘雨劇寒凉/賑幕飢民太半殭)'다며 「풍우가 몰아치고 갑자기 추워지자 가난한 백성이 많이 죽었다」는 한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無田無汲亦無樵(무전무급역무초) 밭도 없고 물 깃는 일도 없고 땔나무도 없는데
 太學生爲灌圃焦(태학생위관포초) 태학생은 물 대기 위해 밭둑을 태우네
 所恠冲襟依舊悅(소괴충금의구열) 괴이한 마음일랑 옛 도에 의지해 기쁘나니
 掛箕今作飮顔瓢(괘기금작음안표) 기산에서 키를 걸고 안자(顔子)의 표주박 물을 마시네
 
 작자는 궁핍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기산에 키를 걸고 안자의 표주박 물을 마시는 옛날의 道에 대해 기쁘다고 한다. '기산에서 키를 걸'은 일은, 요 임금이 천하를 양여(讓與)하려 하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끝내 은거하였던 허유(許由)의 고사이다. 그는 기산에 숨어 살며 손으로 물을 마셨는데 어떤 사람이 바가지 한 짝을 그에게 주었지만 걸어두었던 바가지가 바람에 딸그락 소리를 내자 그것을 버리고 다시 손으로 물을 마셨다고 한다. 안자(顔子)의 표주박 물은 단표누항(簞瓢陋巷)과 관련된 고사이다.
 병와가 영종도에서 목격한 궁핍은 앞에 예거한 것 이외에도 「기촌적맥(飢村摘麥)」의 '궁벽한 마을 보리이삭은 더디 익고/ 바쁜 손길로 베어내어 찧어보지만 죽도 끓일 수 없구나(窮閻麥穗懶騰黃/ 忙手戈舂不厭糠)'와 「염조투신(鹽竈偸薪)」의 '섬사람들은 모두 먹고 사는 문제로 급한데/ 입산을 금하니 몰래 나무를 베어내니 청렴함이 다칠까 걱정이네(最是島民生事急/ 犯禁偸斫恐傷廉)'와 「리중유지친상투(里中有至親相偸)」의 '온 집안이 아이 업고 유리걸식하니/ 담장 너머 도적질이 짐승 벌레 같구나(渾室流離童穉挈/ 䦧墻偸竊獸虫均)'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다소 진정시키는 작물이 있었는데, 영종 용유에서 자생하는 용유순(龍流蓴)이 그것이다.
 
 龍流蓴味最人寰(용유순미최인환) 용유순의 맛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니
 少日親嘗勝丸還 (소일친상승환환) 젊은 날 맛보았더니 환약보다 낫네
 今歲飢民偸採盡 (금세기민투채진) 올해는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캐어갔으니
 却知窮島濟生艱(각지궁도제생간) 궁벽한 섬사람들 생계의 어려움을 구제하는구나
 
 용유순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맛'을 지녔다고 할 정도로 굶주림의 정도가 심각했다. 용유순의 맛을 환약이라 했는데, 배고픔을 벗어날 수 있는 귀한 '약(藥)'으로 생각했기에 주석에는 단약(丹藥)이라 표기하고 있다.
 궁핍과 관련된 시들을 검토해 보았다. '먹을 거 떨어(乏食)'지니 '산과 들에 짐승 드물고 굴뚝에 연기 오르지 않(山野稀禽突未烟)'고 '마른 시체 거리에 가득(藁殣滿街)'하고 '추위는 지렁이처럼(寒蚯結)' 찾아오는 상황이었다.
 
 鳧鶴無長短(부학무장단) 오리와 학은 길고 짧음이 없고
 春蛄有遠近(춘고유원근) 봄 매미는 멂과 가까움이 있네
 毋論足不足(무론족부족) 만족함과 만족하지 못함을 논하지 마라
 我自安吾分(아자안오분) 나 스스로 나의 분수 편안히 여기리
 
 자신의 분수에 대해 편안하게 여긴다는 「안분(安分)」이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절대 궁핍의 상태이지만 배부름과 배고픔을 논할 게 아니라 어떤 것이건 자기의 분수로 편안히 여기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병와에게 영종도에서의 궁핍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불편함이 아니라 도학을 견인하는 계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