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21> 을미년(乙未年) 인천
▲ 청일전쟁 당시 제물포의 일본군.
▲ 감리서 정문.
2015년 을미년(乙未年)이 밝았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지역에 연접해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와 정치·외교적 이해관계로 얽혀있어 협조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을미년(1895)에는 을미사변, 을미의병, 을미개혁 등의 복잡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는데, 당시의 외교문제는 지금도 청산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1895년 을미년 인천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역사적 궤적을 살펴보는 것도 현재 인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2015년 을미년 새해 나아갈 방향을 찾는 방법일 것 같다.

1895년 을미년 정황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은 동북아시아 삼국에도 영향을 줬다. 근대 개항 후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정치·경제적 대립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됐고, 갑오농민운동(1894)은 갈등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갑오농민운동이 진압되고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했지만 철병에 이견이 있음을 기화로 일본군은 선전 포고도 없이 청일전쟁(1894~1895)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아산만 앞바다의 풍도(豊島)에서 육군을 싣고 오는 청의 함대를 습격해 참패시키고, 성환에서도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해 일본군이 압승했다. 그 후 평양, 압록강 전투를 거쳐 일본군은 요동반도·발해만·산둥반도를 장악하고, 베이징과 텐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10여개월에 걸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을 보게 됐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의 개입으로 요동반도를 청에게 다시 돌려줄 수밖에 없었고 이를 주도한 러시아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최근 중국과 일본 간의 조어도(釣魚島) 분쟁도 바로 청일전쟁 이후 빚어진 것으로 일본에서는 1895년 오키나와현[沖繩縣]에 정식으로 편입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간섭의 결과 조선에서는 친러파가 득세했고,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비상수단으로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1895)을 획책했다. 그리고 을미사변을 기해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이 구성돼 청일전쟁 직후부터 진행돼 오던 갑오개혁에 이어 을미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1895년 10월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에 놀란 조정이 선무사를 파견하고,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보내 이를 진압하는 혼란의 틈을 타 이범진(李範晋) 등의 정동파(貞洞派)가 아관파천(俄館播遷·1896)을 단행, 친로내각(親露內閣)이 등장함으로써 정국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20년 전 근대의 실험공간, 인천
바로 이 시기, 인천은 근대사에서 전개된 많은 사건들을 고스란히 체험해야 했던 공간이었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의 현장이었던 것은 물론, 1875년 운양호 사건 후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1882년 임오군란의 배상을 요구하는 조약인 '제물포조약'을 인천에서 체결했다.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역시 인천에서 체결됐다.

그런 와중에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각국의 이목은 제물포로 집결됐고, '제물포 정략'이라 표현될 정도로 이권쟁탈의 공간이 됐다. 특히, 조선에서의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청일 양국의 각축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균형이 깨졌다. 여기에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세력화를 견제하면서 결국 러시아와 일본 간의 러일전쟁(1904~1905)으로까지 확대됐고, 그 도화선도 인천 앞바다에서의 '제물포해전'에서 시작됐다.

청일전쟁 당시 인천은 일본의 물자수송과 상륙의 거점이었는데, 그 흔적들은 지금도 개항장 중구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인들이 병참기지로 사용했던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88년에 신축됐지만, 1883년 미쯔비시(三菱)부산지점 출장소로 시작됐고, 현재 아트플랫폼 내에 남아 있는데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895년 2월 우리 손으로 운영됐던 근대적 해운회사인 이운사(利運社)가 청일전쟁 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일본우선주식회사에 위탁되기도 했다. 월미도에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군수물품을 저장했던 저탄고가 있었고, 일본조계지는 물론, 현 인천여상 인근에 조성됐던 일본공원과 일본인 묘지가 있었던 답동 일대가 당시 출병했던 일본군들의 야영 막사가 설치됐던 곳이었다.

갑오·을미개혁이 진행되던 1895년 인천에도 행정적 변화가 수반됐다. 1883년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항에 설치됐던 인천감리서가 1895년 5월 폐지되고 1896년 8월 복설됐지만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자(1906) 다시 폐지되고 이사청이 관장했다.

1895년 6월에는 감리서 내에서 지금의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의 개교식이 거행됐다. 이 해 7월에 이미 최초로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설치되기도 했던 인천우체사가 외리에 개설되어 갑신정변으로 중단됐던 우편사업이 재개됐다.

2015년 인천, 새로운 전환점
120년 전 을미년의 인천이 구태(舊態)를 벗고 근대라는 미지의 시대로 나아가야만 하는 실험적 공간이었다면, 2015년 을미년, 같은 공간에서 미래를 향한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는 전환점에 있다. 짧게는 인천광역시 행정 20년을 돌아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인천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선조들의 개척과 도전정신을 찾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