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8)야간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시절
145년 미군 상륙 후 인천·서울 통행금지 선포 … 6·25 후 제도 입법화
치안·안보 문제 36년간 유지 … 82년 철폐로 4시간의 심야자유 회복
▲ 1966년 동인천역 광장의 밤 풍경. 건물 위에 설치된 '미원' 네온사인이 광장을 화려하게 비추었다. 나중에 맞은편 건물에 후발업체 '미풍'의 광고탑도 세워져 한동안 경쟁하듯 이곳에 불빛을 쏟아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초초한 표정을 지으며 부산해졌다. 매일 밤 국민 모두가 안절부절 못하는 '집단적 조건반사'를 보였다. 30여년 전 야간통행(야통) 금지가 실시됐던 때의 모습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밤 12시가 넘으면 절대로 다니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다음날 거리 전봇대와 골목 담장에 영어로 쓴 종이들이 나붙었다. 영어 깨나 하는 사람이 더듬거리며 번역을 해줬다. 그런데 단어 하나에서 막혔다. 'curfew'. 처음 보는 단어였다. 콘사이스를 들쳐보니 '유럽 중세 때 소등을 명하는 종소리'라고 적혀 있다. 야간통행금지는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왔다.

광복 이후 이 땅에 내려진 미군정 포고(布告) 제 1호는 '일본 식민지 정책 하에서 해방된 한국 국민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통금을 선포할 수 있다'였다.

그 포고를 근거로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인천과 서울에 통금을 선포했다. 그날부터 두 지역은 밤 8시부터 새벽 5시 까지 통행을 금지했다.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 적국인 일본이 지배해 왔던 한반도 지역에 대해 경계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제도는 1950년 7월8일 전국으로 확대됐고 6.25 전쟁으로 남한이 전시 상황에 빠지자 요지부동으로 굳어 버렸다.

일제하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던 이 통금제도는 1955년 4월 내무부 고시 경범죄 처벌 제 1조 43항으로 입법화 되면서 생활 풍속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 국민은 1945년 9월7일부터 1982년 1월4일 까지 36년 4개월가량 야간통행 금지 아래서 살아왔다. 일 년 내내 야통이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성탄절과 한해의 마지막 날(31일)에는 한시적으로 통금을 해제했다.

1962년에는 군사혁명 제1주년기념산업박람회(4월) 기간에 20일간, 관광의 달(5월)을 맞아 외국인들에게 불편을 줘서는 안된다며 15일간 해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66년 연말연시를 맞아 통금이 해제된 동인천역 부근의 야경 모습이다. 일 년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밤새 꼬리를 물며 질주하는 차량들의 불빛이 번잡하다. 당시 인천에서 유일했던 네온사인도 밤새 번쩍 거렸다. 딱히 갈 곳 없었던 젊은 청춘들은 부나비처럼 화려한 불빛을 쫓아 동인천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1964년 1월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가 통금에서 해제됐다. 이어서 이듬해 해안선이 없는 충북, 그리고 1966년 유명 관광지였던 경주, 온양, 유성 등이 통금에서 벗어났다. 이를 계기로 야통 금지를 없애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당국은 치안 문제, 더 나아가 안보를 앞세워 존속 논리를 폈다. 심지어 대부분의 가정주부들이 통금제도를 원한다는 핑계를 댔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밤늦게 기생집이나 빠에서 술 먹고 다니는 특권층 일부의 부인들 하소연이라고 맞받아쳤다.

20세기에 야간 통행금지가 항시적(恒時的)으로 시행하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한국과 칠레 밖에 없었다.
치안 사태가 좋지 않았던 베트남도 전국적으로 시행하지 않았고 분단 국가였던 독일(서독)도 이 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1982년 1월5일 부터 이 제도를 철폐했다. 정통성에 자신이 없던 정권은 마치 시혜처럼 국민들에게 '빼앗긴 심야의 4시간'을 돌려 줬다. 무엇보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이 제도를 존속 시키는 것은 여러모로 거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폐지했다.

어찌됐던 요즘 말로 하면 36년 만에 '비정상의 정상화'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지역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접적(接敵) 지구와 해안선 등 전국의 52군 292읍·면은 제외 시켰다. 강화군, 옹진군 전부와 인천 인근의 군자, 소래 지역 주민은 이후에도 한동안 여전히 밤에 발이 묶였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