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0>기독교의 전래와 인천
▲ 내리감리교회
▲ 성공회 강화성당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를 의미한다. 조선의 개항 후 독립신문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12월이 되면 성탄절을 중요한 축일로 소개됐고, 기독교인들의 행사도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했다. 광복 후 미군정기에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하면서 성탄절의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

▲천주교의 전파와 인천
기독교는 여러 교단으로 나뉘는데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등이다. 조선은 가톨릭을 서학 또는 천주학이라고 이해하면서 자생적으로 도입했고, 개신교와 성공회 등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됐다. 그 중, 천주교가 가장 먼저 전래됐는데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프랑스인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본격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됐다.

개항 이전 인천 지역에서는 이미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 다니면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신규(李身逵)의 전도활동을 들 수가 있는데 그는 1801년 신유사옥 때 순교한 이승훈의 아들로, 탄압을 피해 인천 만수동에서 전교활동을 하다가 1868년에 순교했다. 인천 만수동에는 이신규의 일족과 부친인 이승훈의 묘가 있는데, 한국 천주교 발상지라고 하는 경기도 광주 천진암 일대의 성역화 작업 일환으로 그 곳으로 옮겨갔으나 최근 인천시는 묘역일대를 개방형 역사체험의 장으로 성지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초의 내리감리교회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시키려는 노력은 상당 기간에 걸쳐 있어왔다.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독일인 구츨라프 일행이 황해도 백령도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한문으로 된 성서 등을 나눠주고 간 일이 있었고, 또 1865년 중국 주재 영국교회 선교사 토마스가 황해도 연안에 상륙 백령도 근방의 여러 섬에서 2개월 반을 지내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서 등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성서의 번역과 그 보급을 통해 조선 선교를 실현하려 했다. 이러한 사업은 선교사들이 조선어로 된 성경으로 전도 사업에 종사할 수 있어서 보다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1883년 미국 공사관이 개설되면서 외국인의 입국이 가능해지자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부에서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인천 개항 이듬해인 1884년 7월 감리교측 선교사로 맥클레이가 조선을 다녀갔고 9월에는 알렌이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내한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했는데, 당시 권력자이면서 조미수호조약 체결 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방문한 바 있는 민영익이 개화당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때 의료 선교사인 알렌이 그를 완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일로 선교사들에 대한 정계와 왕실의 신임이 커졌고, 자유로운 선교의 가능성도 높아져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의 선교에 주목하고 있었던 미국 장로교와 북감리교 본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에서의 선교를 결정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우선 파견하게 됐다. 이때가 1885년 4월5일 부활절 날이었으며,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한 날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물포에 입항했을 당시는 갑신정변의 소용돌이가 가시지 않아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했다.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푸트는 이들의 상륙 소식을 듣고 언더우드의 입경(入京)은 용인했지만, 임신한 부인과 함께 온 아펜젤러의 경우는 신변의 위험을 들어 입경을 거부했다. 아펜젤러는 푸트공사의 권고에 따라 1주일간 대불호텔에 머물다가 4월13일 일본으로 돌아갔고 6월20일 다시 제물포항을 통해서 입국했다. 그리고 7월7일 일본에서 주문한 '풍금'이 도착하자 찬송가를 봉헌했는데 '이를 전후한 시기'를 인천 '내리교회'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후 내리교회는 인천 시내 곳곳에 지교회를 세우고 부평·강화·교동 등지에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인천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유지로서 만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포교지였던 것이다.

▲답동성당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서울과 개항장에서 선교사들의 거주가 허용되고, 1887년 5월 조약이 정식으로 비준되자, 결과적으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까지도 전도와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게 됐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圭三) 주교는 조약에 의거해 성당의 여러 가지 시설에 필요한 대지의 물색을 서둘렀다.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高宜善) 신부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되었는데,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이후 1888년 7월 빌렘(洪錫九)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1일이었고, 이때 빌렘신부가 인천으로 부임하게 됐다. 인천 본당의 창설과 빌렘신부의 인천 정착은 천주교 전도사업의 새로운 계기가 됐다.

▲성공회 내동성당과 강화성당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코프(고요한) 주교와 내과의사인 랜디스(남득시)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코프 주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포교에 전념했고, 랜디스는 현재의 성당자리에서 성 누가병원을 개설하고 의료구호사업에 전심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코프 주교는 다국적 선교팀을 꾸미면서 한편으로 한국 선교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1893년 7월에는 워너(왕난도) 신부를 강화도에 파송하여 선교를 개시했다. 그러나 성내 출입을 금했기 때문에 갑곶리 진해루 밖에 있던 나루터 근방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기도소와 처소를 정했다. 1900년 이곳에 현재의 한식중층건물을 완공했는데 한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한옥 성당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