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0-전보
인천 - 의주 '국내 최초 전신선' 청국 주도
▲ 전보총국 개국 전에 제정된 '전보장정(인천개항박물관 소장)'. 국문 전신부호가 수록돼 있다.
전보는 없어서는 안 될 정보의 전달자였다. 전화값이 집 한 채와 맞먹던 시절, 급한 소식을 주고받으려면 전보만한 게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목숨을 구한 것도 전보요, 군대 나간 자식에게 부모의 부음을 전해주고, 입학이나 취직 시험의 합격 소식도 전보가 알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특별히 아름답게 꾸민 송달지를 봉투에 넣어서 전달하는 각종 경축전보, '삼가 조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조의 전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 '근하신년'이란 문구가 인쇄된 연하전보, 촛불과 트리, 교회지붕의 십자가가 어우러진 예쁜 성탄축하 전보도 있었다.

하지만 도입기의 전보는 그를 장악하려는 열강들의 암투로 얼룩져 있었다. 인천이 개항됐던 1883년 덴마크의 회사가 적지않은 돈을 들여 부산-나가사키 사이에 해저선을 깔았던 것부터가 그랬고, 1885년 인천-서울-평양-의주를 잇는 국내 최초의 전신선도 사실상 청국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때 이미 글자를 점(·)과 선(-)으로 변환시킨 모스 부호를 원용해 김학우가 만든 국문자모 호마타법(國文字母號碼打法)이 사용됐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지만, 정작 우리의 실질적 전보 관장 기구인 조선전보총국이 창설된 것은 1890년이고, 통신원은 1900년에야 문을 열었다.

그렇게 곡절 많던 전보사(電報史)였는데, 1905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통신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전보는 도리 없이 식민 침탈의 도구로써 이용됐다. 광복 후, 6ㆍ25전쟁 땐 전신망이 와해 직전이었으나 그를 총력으로 재구축해 1960년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

각종 전보가 실생활에 활력을 주었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인터넷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이메일을 전 세계 동시간대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됐고, 불과 20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었던 스마트폰시대가 도래하자, 급기야 정부가 1997년 2월 전보 시행법령까지 폐지했다.

봉수, 역참제에서 근대로 넘어온 통신 풍속도가 첨단 기술에 의해 또 바뀐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전보는 살아있다. 원래의 기능과 목적은 약화됐지만, 축하, 조의. 연하, 성탄에 관한 전보는 성격상 쉬 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