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인천의 자매도시, '충칭(重慶)'을 다녀와서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인천의 자매도시, '충칭(重慶)'을 다녀와서
  • 김진국
  • 승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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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남부의 유일한 직할시인 충칭시는 인구가 대한민국의 반이 넘는 무려 3100여 만 명이다. 땅덩이도 충청북도를 뺀 것과 맞먹는다. 첫 인상은 한 마디로 '크다'였다. 거리도, 강도, 빌딩도 다 컸다. 필자를 초청해 준 충칭우전대학교도 교내 셔틀버스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큰 나라 중국 안의 또 다른 큰 도시 '충칭'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4시간 거리. 1919년 4월 21일 민족지도자들이 인천 만국공원에서의 한성임시정부 선포 이후 상해(1919년)를 거쳐 항주(1932년)-진강(1935)-장사(1937)-광주(1938)-유주(1938)-기강(1939)을 지나 이곳에 이른 항일 독립운동의 유적지요, 인천광역시의 자매도시라는 생각이 미치자 난생 처음인 충칭이 가깝게 느껴졌다. 

 외우(畏友)인 방송인 박대석 군이 KBS 기자 시절, 수교 전 대한민국 기자 최초로 취재차 방문했던 곤명(昆明)과 가까운 곳이요, 필자가 교사 시절 당송 시대의 한시를 가르칠 때, 이백과 쌍벽을 이뤘지만 세상을 비관했던 저 두보(杜甫)가 피난 가 있던 성도(城都)와 이웃해  있는 쓰찬성(四川省) 안의 한 지역이었다.    

 인천과 충칭 사이를 오가는 비행기는 생각보다 많았다. 주 11편이나 된다. 아시아나와 중국국제항공사가 부지런히 여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지난 8일 오후 3시 55분 인천을 출발한 중국국제항공 C400편 보잉737기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인천과 충칭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던 것이다. 

 충칭국제공항은 끝이 안 보이는 활주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항 건물은 이 도시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다. 대학 측에서 보내온 차를 타고 40분을 달리는 동안, 길가에 이어진 높다란 아파트들과 거리를 달리는 외제 차량들이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우리의 도량형 감각으로는 가늠이 안 되는 충칭의 첫 인상에 스스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1950년 충칭 남안(南岸)에서 개교한 충칭우전대학은 교사 면적만 70여 만m, 재학생 2만4천여 명, 연구생 3천여 명, 교수 1600명이 함께 사는 교육 타운이었다. 학생들의 기숙사, 와 교직원 숙소, 교수 사택이 모두 대학 안에 있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 풍경이었고, 대학교가 직영하는 호텔 역시 교내에 있어 필자도 그곳에 머물렀다.

 여장을 풀고, 배해영 초빙교수 내외, 대학 외사처 직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학교 정문 앞 '대학생 거리'를 둘러봤다. 인하대학교 후문 풍경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특이했던 것은 우리의 포장마차 비슷한 '꼬치구이' 수레가 죽 늘어서서 연기를 피우며 대학생 손님들을 밤늦게까지 맞고 있었는데, 꼬치구이를 굽는 냄새가 구수했다. 

 이튿날, 일정이 빡빡했다. 오전 9시 대학 본관 귀빈실에서 류옌빙(劉宴兵) 부총장을 만나   학교 소개와 타국 대학과의 자매결연 실정, 한국 유학생의 현황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10시 30분부터 학교사 전시관을 관람했다. 

 대학의 위치는 중국 서남부의 중심도시 충칭이지만, 통신산업 및 정보산업 분야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며, 언론, 경영, 법학, 약학, 예술, 체육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종합대학임을 각종 사진과 자료, 문서, 실체 자료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해외의 대학과 기업과의 교류 상황도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 대학 간의 교류는 1994년부터 인하대학교를 비롯해 카이스트, 고려대, 건국대, 단국대 등과 하고 있으며, KT, SK, 하이닉스 등이 파트너가 되어 인력 지원, 공동연구개발 등을 하고 있다고 안내하는 대학생이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해 주었다. 

 오후 2시 30분, 예정되었던 언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필자의 특강이 언론학과 미디어 실에서 있었다.(사진 참조) 주제는 '언론 문장과 한중일의 소통'이었다. 필자는 유명 해외통신사 AP가 기자 교육을 위해 발행한 '가이드 투 뉴스 라이팅'을 인용해 미국, 한국, 중국의 언어 구조가 각기 다르지만, 그 대강은 같다며 사례를 중심으로 3시간 가까이 강의를 했다. 

 주천(周泉) 씨의 유창한 통역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의사를 전달했는데, 한글의 과학성, 한중일 한자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3국 공통한자 정형(定形) 지키기, 일본에 비해 중국과 한국에서 등한히 하고 있는 붓글씨 교육의 부활 등에 대해 학생들이 공감하는 눈치였다. 학생들의 질문이 다양해 예정시간을 넘겨 끝냈다.  

 이튿날 오전, 배해영 초빙교수의 안내로 중칭시 유중구 연화지 38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3ㆍ1독립운동 이후 우리 민족지도자들이 만리타향 이곳에까지 와서 독립에의 꿈을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유적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임시정부 27년 역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곳이 충칭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주석을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여러 독립 세력을 총합해 연합정부를 구성한 점과 1914년의 '대일선전성명서' 발표와 1944년의 국내 진공작전 추진 등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장면들이라 생각했다. 

 1994년 6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인민우호협회가 복원 협정을 체결한 후 1995년 8월 개관했지만, 습한 환경으로 임시정부청사가 부분적으로 훼손되자 2000년 건물을 개보수하고 전시 내용도 수정, 보완했다고 한다. 다섯 채의 건물로 이뤄진 청사는 주석 판공실을 위시해 외무부 장관실, 국무위원 집무실, 외빈 숙소, 임시의원원 회의실 등이 있었다. 

 중경 임시정부청사 직원 오람 씨의 안내로 찾아간 충칭시 추용로 37호에 소재한 한국광북군 총사령부(사진 참조ㆍ면적 800평방미터, 연면적 2,700평방미터)는 건물을 옛 그대로이나 현재 상가가 들어서 있어 매입 후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양국 정부가 속히 이를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

 점심시간에는 모처럼 한국 식당 '리아'를 찾았다. 이곳에서 귀한 이들을 만났다. 현지 교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민 종합 정보지 '서남저널'을 9년째 내고 있는 윤세영 발행인과 인천시가 지난 5월 충칭시에 파견한 상주 공무원 김인수 씨를 만났다. 충칭시와 인천시의 교류 최일선에 서있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충칭의 가능성에 착안해 인천이 더욱 더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같은 날, 오후 5시 배해영 초빙교수가 한 개 층을 모두 운영하고 있는 대학 내 Siko 빌딩 17층 GIS연구소에서 한국 유학생들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국제화시대의 유학의 중요성, 어학 능력의 효용성 등을 강조한 후 독서가 대학생활 전반은 물론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질의응답을 나눴다. 귀국 후에도 학생 10여 명이 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등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12월 6일 충칭시 일정 마지막 날, 배해영 초빙교수 내외, 외사처 직원 등과 함께 충칭에서 약 168Km 떨어진 세계문화유산 '대족석각(大足石刻)'을 찾았다. 당대 말부터 주변 산에 약 5만 개의 불교 관련 석각군(石刻群)을 만든 것인데, 규모도 크고, 예술성도 높아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북신구(北新區)에 있는 대규모의 정원공원인 '원박원(園博園)'엘 들렀다. 역시 '컸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중국 각지의 정원을 재현해 놓았는데, B구역 제32호에 다가가니 낯익은 구조물이 눈이 들어온다. 인천광역시가 제공한 '인천대교' 모형물이어서 반가웠다. '인천'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러나 한글 안내 표지판의 글은 요령부득인 공문서의 문장을 보는 듯해서 낮이 뜨거웠다. 주술관계도 맞지 않고, 글의 끝을 '~부지의 한계를 고려하였음.', '~인천의 미래를 상징하는 기념정원을 조성하고자 함.'이라고 해 무슨 시방서를 보는 듯했다. 

 씁쓸한 기억을 남긴 채, 시간을 쪼개 어둑어둑해질 무렵 충칭시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제팡베이(解放塔)' 거리로 갔다. '해방탑'이 있는 곳이라면 중국 공산당의 혁명 사적지의 하나일 터인데, 탑 광장을 둘러싼 백화점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상품은 죄다 갖다놓은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조명과 활기찬 인파와 함께 뒷골목의 시끄러운 마작(麻雀) 집, 복권 파는 집, 불빛으로 지은 다층 기와집 같은 '홍야뚱'의 풍광, 그 거리에서 재즈를 들려주는 장발 청년들의 밴드의 연주소리들은 중국의 약동하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이튿날 아침 8시, 대학에 내 준 차를 타고, 중칭 공항으로 향했다. 10시 25분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비행기에 올랐다. 출국검사를 마친 후 셔틀버스를 타고 비행기 바로 앞에까지 가서 타랍에 오르는 이색적인 탑승 체험을 하기도 했다. 

 주마간산 같은 4박 5일간의 충칭시 방문을 마치고, 발아래 깔린 구름밭을 바라보며 두 도시간의 상공, 무약, 관광 분야 등 상호협력은 물론 민간단체, 유학생 파견을 통한 우호 교류가 더욱 활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충칭시 한 곳만도 인구가 3,100만이다. 기왕에 서로 공무원까지 상주시키고 있는 자매도시를 중국 내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아 상생한다면 동북아의 내일이 좀더 평화롭고 윤택해지리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조우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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