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8> '서곶'과 서구
▲ 세어도전망대
▲ 경인아라뱃길
'곶(串)'은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반도(半島)처럼 생긴 작은 지형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에는 '곶'이란 지명이 수 없이 등장하고 있다. 곶의 안쪽은 '곶의 안'→'고잔(古棧)'으로 음차되고, '곶의 밖'은 '곶 밖'→'꽃밭'이 되어 꽃 '화(花)' 밭 '전(田)'의 '화전(花田)'이 됐으며, 배가 닿는 곶은 '배 곶'→'배 꽃'으로 음차돼 배 '이(梨)' 꽃 '화(花)'의 '이화(梨花)'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됐다.

▲서구의 연혁
인천광역시 서구는 옛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석곶면(石串面)과 모월곶면(毛月串面)을 주축으로 하고 1995년 인천직할시가 광역시로 승격될 때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을 편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서구지역에 해당하는 방리(坊里)는 정조 13년(1789)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타나고 있는데 석곶면에는 봉현리, 가정리, 신현리, 포촌리, 번작리, 가좌리, 율도였고 모월곶면은 공촌리, 연희리, 고잔리, 검암리, 시천리, 백석리, 청라도, 난지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의 가정동, 신현동, 석남동, 원창동, 가좌동을 포함하는 남쪽이 석곶면이었고 백석동, 시천동, 검암동, 경서동, 공촌동, 연희동, 심곡동을 포함하는 북쪽이 모월곶면이었다. 이 두면은 승학현(昇鶴峴·싱아고개, 가정동과 심곡동 사이의 고개)을 경계로 구분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1일 조선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토대로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때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해 '서곶면'으로 하고 이 때 새로 신설한 부천군에 소속되게 했다. 서곶은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게 뻗어있으므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1968년 구제(區制)를 실시하게 되면서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 구청을 설치하고 북구에는 서곶출장소를, 남구에는 남동출장소를 두었다. 이어 1988년 1월1일 북구에서 서구가 분구됐는데, 이 때 이곳의 역사를 감안해서 '서곶'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교통과 군사의 요충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주목되어졌던 것은 신라 말 고려 초부터로,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구 지역 사회의 독특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경서동 녹청자도요지이다. 이 시기는 전국적으로 지방의 호족세력이 발흥하던 때로, 서구와 부평을 아우르는 지역에서도 많은 지방 호족이 출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농경을 중심으로 매우 안정되고 풍요한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경서동 녹청자도요지는 옛 고잔리('곶의 안쪽') 지역으로 가마의 위치가 해안과 바로 연결돼 있는 점으로 보아 뱃길을 따라 이동이 쉬운 광역의 판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용으로 제작된 녹청자의 대량생산을 통해 수도권 일대에 상권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며, 상업과 해상세력을 갖춘 상당히 유력한 호족들도 출현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인천 앞바다에서 강화수로에 이르는 해상교통은 고려와 조선시대 서울로 수송되는 삼남지방 세곡(稅穀)의 중요 운송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강화도의 손돌목은 급물살로 인해 해난사고가 빈번한 지점이었다. 강화를 거치지 않고 인천과 부평을 경유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이 바로 김포굴포(堀浦)였다. 고려시대 이미 조세선이 손돌목의 위험을 피하고 안전하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도록 굴포작업에 착수했으나 실패했고, 조선 중종대(1506~1545)에 김안로(金安老)가 재차 김포굴포 작업에 착수했으나 원통현(원통이고개, 간석동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경인국도 고개)까지 이르러 아쉽게 중단됐다. 원통이고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숙종 36년(1710)에는 금위영제조(禁衛營堤調)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의해 이 곳 '석곶'에 방어진을 설치했는데 유사시 강화 덕진진과 영종진 두 곳이 동시에 공격당하면 한양도성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길목인 이곳에 군대를 주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조선의 개항을 앞두고 1875년 영종진이 일본에 의해 함락되자, 개항 교섭의 진행과 함께 인천과 부평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1879년 화도진, 연희진(모월곶면)과 여러 곳의 포대가 축조됐던 것도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굴포작업이 실패한 후 전조창(轉漕倉)을 서곶면 포리에 설치했는데 이곳까지 온 세곡을 서울까지 육로로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창고였다. 이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인천시 서구 원창동(석곶면) 한화 에너지 북쪽 해안에 전조창 터로 보이는 유지가 남아 있고 배가 출입한 것으로 보이는 수로도 확인된다.

▲미래를 향한 서구
1930년대 후반부터 경인공업지대를 병참 기지화한 일제는 적절한 공업항을 물색하기 위해 인천항 북부에 대한 수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월미도 서부에서 율도 북쪽에 이르는 수로는 대형 선박의 정박이 항시 가능한 수심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면한 북해안에는 광대한 간석지가 발달돼 있음을 알게 됐다.

따라서 이 간석지를 매립해 광대한 공장 지대를 형성하고 이로부터 경인공업지대와 연결하면 자유로운 공업항으로서 천연의 양항이 될 수 있음이 판명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1936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6개년 사업으로 인천 북항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서구의 해안 지역은 평야의 발달은 미미하고 간석지나 갯골이 분포한 긴 해안선을 이루고 있었으나 계속된 간척 사업으로 밋밋한 모양으로 변했다. 염업이나 어업 등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북항과 인근 섬 지역은 대규모 매립으로 인해 과거의 지형이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경인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북항 건설 등이 이루어지면 인천지역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게 될 매우 유리한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경서, 원창, 연희동 일대와 청라 매립지 등은 서울에 인접해 있는데다가 인천 국제공항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개발 대상지 가운데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과거로부터 바다로 향하고 조세선의 길목이며 군사적 기능도 겸비하고 있던 서구의 무한한 발전을 기대해 본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