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18-이민
▲ 초기 이민자의 여권. 정부 기관 '유민원(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이 발급했다.
인천사의 시조 비류는 이주민이었다.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태어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2030여 년 전, 산 넘고 물 건너 물어물어 당도한 곳이 지금의 남구 문학산 일대였다. 나라의 이름은 '미추홀(彌鄒忽)'. '물이 많은 고을'이란 뜻을 지녔다고도 해석한다.

그가 절대 권력과 부귀영화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혈육의 정과 산천초목을 뒤로 한 채 고국을 과감히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제 꿈을 실현하겠다는 개척정신을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용기가 없었다면, 그는 역사에 흔해 빠진 권력투쟁의 한 주인공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류는 이 땅에 '미추홀국'을 세워 인천사의 씨를 뿌렸으며, 대대손손 우리의 핏속에 '개척의 DNA'를 면면히 흐르게 해 주었던 것이다. 1902년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이민 121명이 인천항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향했던 장거가 그를 표징하고 있다.

1세대 이민자의 80%가 넘는 인천의 종교인, 지식인, 퇴역 군인, 시민들은 근로조건이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자협회의 대리인 데쉴러가 내걸었던 것과는 딴판이었지만, 악조건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농장 안에 교회를 세우고, 이어 학교를 열어 자식 교육에 전념했던 것이었다.

독립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동지회, 국민회 등을 결성해 젊은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고, 보상 받을 기약이 없는 독립 공채를 뜨거운 정성으로 사들여 상해임시정부를 도왔으며, 1954년에는 중앙기독학원의 부지를 팔아 인하대 건립의 종자금을 보내왔던 것이다.

두 번 다시 나라를 잃지 않으려면, 2세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온 국민과 해외동포의 애국적 열망을 담아 세운 민족대학 '인하대'이 건립 60주년을 맞은 것은 그 뜻이 범상치 않은 것이요, 지역 정체성의 요체인 '개척정신'이 근간에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늘, 인천의 인구 태반은 '비류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이주의 역사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주(移住)'가 국내적 개척이라면, '이민(移民)'은 해외 진출로 모두 용기 있는 이들의 인생 최대의 사업이었다. 오는 22일 이민 112주년을 맞는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