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5. 겨울철 구호의 손길이 필요한 거리의 천사들
▲ 1960년대 중반 인천시에서 마련한 부랑인 임시 수용소의 모습. 군용 천막 안에 작은 난로 하나 피워 놓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묻어난다.
일제강점기 선감도에 부랑자 수용시설 건립

산업화 시절엔 부모있는 아이들도 붙잡아가

광복 후 정부 걸인대책위 조직·후생복권 발행



폭풍한설이 몰아치면 지내기 가장 힘든 이들은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다. 거리를 떠돌며 문전걸식하던 사람을 일컬었던 '거지'라는 호칭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 '거지같은 놈' '빌어먹을 놈' 이란 말은 참기 힘든 욕설이었다.

행태만 변했을 뿐 거지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도 '부랑아'로 불린 걸인들의 문제는 항상 골칫거리였다. 1934년 10월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인천 인구 6만명에 끼니를 제대로 잊지 못하는 궁세민(窮細民)이 4582명(일본인 4명)이었다. 아예 주거지도 없이 유리걸식하는 걸인은 59명으로 조사되었다. 겨울철 걸인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빈 집이나 골목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화재가 자주 발생했고 굶주려 얼어 죽은 시신 '강시()'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일제는 부랑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경기도 사회사업협회 기부금으로 옹진군 선감도(대부도 인근) 전체를 매수해서 복지시설을 설치했다. 1942년 5월 인천에서 배편으로 195명의 부랑아를 수송하면서 개원했다. 대부분 거리를 배회하다가 잡혀간 그들은 강제 노역과 가혹 행위를 피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헤엄치는 게 유일했다. 당시 적지 않은 수가 물을 건너다 익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수용소는 1946년 2월 '선감학원'이란 사회복지시설로 간판을 갈아 달고 1982년 10월에 폐쇄될 때까지 전쟁고아와 부랑아 등을 수용했다.

광복 후에도 걸인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1950년 초 전국적으로 3만여명의 걸인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중 수용된 인원은 서울, 인천에 700여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동냥, 절도, 소매치기 심지어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좌·우익 분쟁의 혼란기를 틈타 북한에서 보낸 간첩들이 남한에서 거지 행세를 하며 조직을 확장해 방화와 파괴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퍼져 부랑인 문제는 국가 안위에도 큰 위협을 줬다. 정부는 각 도에 걸인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걸인강제수용법을 만들어 인구 10만명 이상 도시에 수용소를 설치하는 한편 걸인 돕기 후생복표(복권)를 발행하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 서울의 자생원에 수용된 걸인들이 구걸하며 푼푼이 모은 돈 2200원을 군용기 헌납 기금으로 동아일보에 기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6·25 전쟁은 또 다른 부랑인들을 양산했다. 거리마다 전쟁고아와 거지들이 넘쳐났다. 인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는 1955년 12월16일 도원동 산꼭대기에 부랑아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인천소년수양원을 건립했다. 구두닦이 등 거리의 소년 약 500명을 모아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집 없는 아이들에게는 합숙소까지 제공했다. 이 수양원은 1965년 광성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오늘의 인천광성중고교로 성장한다.

1960년대 산업화시기에 접어들자 농촌에서 대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이 직장을 찾지 못해 거리마다 걸인, 넝마주이 등이 넘쳐났다. 보사부는 그들이 동사, 아사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년 12월 1일부터 다음해 2월28일까지 3개월간 부랑아구호정책을 펼쳤다. 인천시와 인천경찰서는 매년 합동단속을 통해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들을 붙잡아 선감도로 이송했는데 실적 위주의 단속으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지유성(15)은 1964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구경하기 위해 인천으로 왔다가 동인천역에서 붙잡혔고 장성길(16)은 운동장 근처로 행상을 하러 왔다가 단속에 걸려 섬으로 끌려갔다. 이렇듯 인천전국체전 기간 중 감옥과 다름없던 선감도에 수용된 아이들의 수가 82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돼 큰 물의를 일으켰다. 연고자 소재 파악을 위해 당시 신문에 그들의 명단이 게재되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