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17-공원
'각국' → '만국' → '자유'공원 역사적 흐름도
▲ 사진엽서에 소개된 각국공원의 모습. 존스턴 별장과 테니스 코트가 보인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파고다공원은 원래 고려 때 흥복사가 있던 자리로 조선 세조 때 원각사라 개칭했다. 도성 안에서 제일 큰 가람이었으나, 조선의 배불정책에 따라 중종 때 모두 허려 빈터로 남아 있다가 영국인 J. M. 브라운에 의해 1897년(광무1)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한때 이 공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라 했지만 인천 지역사를 알지 못했던 일부 사학자의 오류였다. 이보다 앞서 1888년 인천 응봉산 일대에는 이미 '각국공원(各國公園)'이 개원되었고, 국내 최초의 양관인 '세창양행' 건물 등이 건립되는 등 이국정취를 자랑했다.

총리아문참의 뮐렌도르프의 천거로 1883년 9월 인천 제물포에 와서 살았던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했다. 청국과 일본만이 조계(租界)를 차지한 데 대해 불만을 품었던 여러 나라 외국인들의 요구에 의해 '각국조계'가 설치되었고, 그 안에 공원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파고다공원이 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면, 그 새 이름이 바뀐 인천의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는 같은 해 4월 2일 전국 13도 대표자가 모여 '한성임시정부'의 각료 명단을 발표한 유서깊은 독립 운동의 상징지였다.

한성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만오(晩悟) 홍진(洪震) 선생이 대회 장소를 '만국공원'으로 잡은 것은 공원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당시 선대들은 우리가 '만국(萬國)'의 일원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만국의 장(場)'에서 '만국'을 향해 독립국임을 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국공원'이란 이름은 인천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청국에도 수개 처에 '만국공원'이 있었다. 6·25전쟁 후에는 선대 지식인들이 앞장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자유'를 되찾았다는 취지에서 이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고쳐 불러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공원에는 근대의 유적 대부분이 헐리거나 전쟁통에 사라졌지만, 원형만은 보존되어 있다. 서울시가 탑골공원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데 반해, 인천시는 아직 최초의 공원이자, 한성임시정부의 유적인 이곳을 '문화재'로 지정치 않고 있다. 재고해야 할 일이라 본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