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4. 월남 파병의 출항지 인천
▲ 1965년 인천항에서 열린 해군수송대(백구부대)의 환송 모습. 그들은 후에 월남에서 철수하는 장병들을 다시 안전하게 고국으로 수송하는 임무도 맡았다.
1965년부터 파병대 출발지

통조림김치 등 물자조달처

월남난민 정착·경유지 역할



올해는 월남 파병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64년 5월9일 미국 존슨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 우방국에 '남베트남(월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한국 정부 측에는 '1개 이동외과병원'의 파병을 요청했다. 1964년 9월11일 이동외과병원 인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총 140명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1965년 3월10일 2차 파병을 했다. 공병대대를 중심으로 한 경비대대, 수송자동차중대, 해군수송분대(LST) 등으로 편성된 건설지원단 '비둘기부대'는 인천항에서 미 해군 수송함에 승선해 미 제 7함대 소속 함정과 함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사이공을 향해 출항했다. 사진은 그날 오전 6시경 인천항에서 진행된 환송식의 모습이다. 동트기 전, 이른 시각에 군 관계자와 가족들이 부두에 나와 수송함 바로 앞에서 차디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월장병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해 10월13일 이번엔 실질적인 전투부대가 베트남으로 향했다. 사단장 채명신 장군이 이끄는 전투사단 '맹호부대'가 미 제 7함대 수송함 '베이필드'호 등 3척에 나눠 타고 인천항을 빠져 나갔다. 이후 1973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31만3000명이 낯선 땅 월남으로 파병되었다. 동네마다 한두 명의 젊은이가 월남에 건너가 베트콩과 싸웠다. 1970년도 인천시정백서에 의하면 1968년과 69년 인천의 파월장병가족세대는 692세대로 조사되었다.

인천항을 통해 나간 것은 장병뿐만 아니었다. 각종 물자가 쉴 새 없이 월남으로 향했는데 그 안에는 '김치'도 끼어 있었다. 쌀이나 고기는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했지만 김치는 그렇지 못했다. 장병들은 고국에서 만든 토종김치가 그리웠다. 정부는 김치를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보내기로 했다. 1966년 8월1일 정부 지원을 받은 인천원예협동조합은 김치통조림을 생산할 식품가공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인근 농촌에서 생산하는 각종 농산물의 조달이 편리한 수인선과 제품을 바로 선적하기 좋은 인천항이 이웃한 신흥동(현 신광초교 뒤)에 부지 2000평을 마련했다. 1967년 3월18일 오전 11시 드디어 국내 최초의 김치공장이자 통조림공장의 준공식이 열렸다. 이날 농림부장관, 경기도지사, 농협중앙회장 등이 참석할 만큼 이 공장의 가동은 그 의미가 컸다. 서독에서 들여온 설비를 갖춘 이 공장은 연간 200만통의 통조림을 생산해내며 파월장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월남으로 모든 게 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월남 패망 후 많은 난민들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1977년 8월3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싣고 한국으로 향하던 라이베리아 선적 유조선이 남지나 해상에서 보트피플을 구조했다. 어린이 14명이 포함된 33명(남24명, 여9명)은 인천항으로 들어와 신흥동에 있던 옹진군민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듬해 2월13일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싣고 한국으로 오던 화물선 상동호가 45명, 1979년 9월28일 석탄공사가 수입하는 석탄을 싣고 오던 영국 선적의 화물선이 32명 등의 난민을 각각 구조해 인천으로 들어왔다. 당시 인천, 부산 등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월남 난민의 수는 20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한국에 잠시 수용되었다가 대다수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했다. 일부는 이 땅에 남아 주점이나 음식점을 운영하며 힘겨운 삶을 꾸려 나갔다. 신포동에서 전통복 아오자이를 입고 과일냉차 장사를 해 눈길을 끌었던 웬레슨(28)이라는 베트남 여인도 그 중 한명이었다. 중구 일대와 부평 지역에는 '뉴사이공' 등의 간판을 달고 장사를 한 베트남인들이 몇 명 있었다.

월남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사람들도 속속 귀국했다. 전장에서 돈을 번 그들은 중구 도원동에 당시에는 고급 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슬라브 2층집을 여러 채 짓고 함께 살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월남촌'이라고 불렀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