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16>이규상의 죽지사③ - 바닷가의 무속현장
18세기 인천 바닷가의 무속현장을 나타내는 자료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이규상의 <죽지사>에는 인천사람들의 무속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한시(漢詩)가 있다.

 漁戶鹽村好鬼神(어호염촌호귀신) 어부들 염부들 귀신을 좋아하여
 蒸豚飯稻祭新春(증돈반도제신춘) 돼지를 찌고 쌀밥을 해서 새봄에 제사 지내네
 暗窺魍魎憐多少(암규망량련다소) 몰래 도깨비를 엿보는 모습 다소 불쌍하기도
 坐占經營判富貧(좌점경영판부빈) 경영을 점유하여 부귀를 판단하게나(<속인주요> 5연)
 
 海俗秋來競賽神(해속추래경새신) 바닷가 풍속에 가을이 오면 다투어 굿을 하고
 繁鮮懸布拜巫人(번선현포배무인) 여러 생선 놓고 베를 매달고 무당에게 절을 하네
 不知乃祖荒原臥(부지내조황원와) 조상들 거친 들판에 누운 거 알지 못하고
 香火蕭條度幾春(향화소조도기춘) 제사 쓸쓸한 지 몇 봄이 지났는가(<속인주요> 7연)

5연과 7연에 나타나듯 바닷가 사람들은 생업이 바다와 밀접한 만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치우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다. 돼지고기와 쌀밥(蒸豚飯稻)이라는 일상적이지 많은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놓고 제사를 지내며 무당에게 수없이 절을 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멀리하는 유학자에게 그것이 긍정적일 수 없었다. 작자는 그들을 불쌍하다면서(憐多少) 동시에 사람이 부귀해지는 것은 '도깨비를 엿보는 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 그것의 특성 및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 등을 두루 강구해야 부귀에 가까울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영을 점유하는 것'이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음식과 옷감을 부질없이 굿에 소비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몇 해 동안이나 조상에게 지내지 못한 제사에 신경을 쓰라고 하고 있다.

 殘祠掩映鶴山巓(잔사엄영학산전) 허물어진 사당이 문학산 꼭대기 어렴풋이 가리고
 靈妾神官繡幔聯(영첩신관수만련) 영첩과 신관의 비단 장막 이어져 있네
 沼海漁人祈厚福(소해어인기후복) 갯가의 어부는 두터운 복을 빌려고
 春來先薦尺魚全(춘래선천척어전) 봄이 오면 큰 생선 놓고 신굿하네(<속인주요> 6연)

6연의 '신관의 비단 장막 이어져 있(神官繡幔聯)'는 '허물어진 사당이 문학산 꼭대기 어렴풋이 가리(殘祠掩映鶴山巓)'는 것을 통해 보건대 신굿을 하는 공간이 문학산 기슭의 해안가였다. 어부들에게 '두터운 복(厚福)'은 다름 아닌 풍어(風魚)였을 것이다. 이러한 무속현장은 사당에서만 한정된 게 아니었다.

 (…중략…)
 時平老卒看烽燧(시평로졸간봉수) 태평시대에 늙은 병사는 봉화 살펴보고
 地僻居人祭樹林(지벽거인제수림) 궁벽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에 제사 지내네
 歸馬更穿松竹影(귀마경천송죽영) 돌아오며 말이 다시 송죽 사이의 길을 뚫으니
 怪聲相喚綠毛禽(괴성상환록모금) 푸른 털의 새가 서로 부르며 기괴한 소리를 내네
  (<사천시초(槎川詩抄), '문학산'>)

이병연(李秉淵, 1671~1751년)의 '문학산'이라는 한시의 일부분이다. 작자는 문학산 정상에 올라 서해 바다의 파도와 낙조를 읊다가 봉수대를 거쳐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 밑에서는 문학산 인근의 사람들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고(祭樹林) 있었다. 그들의 가치체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풍어(風魚)를 위해, 신목(神木)을 정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바람을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산 인근의 바닷가 사람들에게 바다는 생업의 공간이었다. 소금 생산 및 풍어는 그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런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이규상이었기에, 그는 무속행위를 하는 바닷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한켠으로 '부귀를 판단하는 일'은 '경영을 점유하'는 곧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지 귀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경영을 점유하라(坐占經營)'는 작자의 일침(一針)은 어부와 염부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신이 맡은 분야의 특성을 두루 살피고, 그것을 토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잠언(箴言)으로 기억해도 무방할 듯하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