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청나라 상인 터전 … 관광명소 변모
[인천일보 연중기획] 청나라 상인 터전 … 관광명소 변모
  • 조현준
  • 승인 2014.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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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6> 청관에서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 청관거리.
▲ 짜장면 박물관.
'화교(華僑)'란 중국 국적을 갖고 이주한 제1세대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본토(타이완포함) 이외에 살고 있는 해외교민을 가리킨다. 현지에서 태어나 현지국적을 가진 제2세, 3세는 화인(華人)으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 한국에 진출한 화교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한 이도 없지 않았으나 인천의 경우가 대표적이듯이 주로 수출입 무역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고 특이하게도 농업종사자 들이 많았다.

▲1600년 전에 시작된 최초의 해상교류
한국 역사에서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교류는 인천의 능허대(凌虛臺)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백제 근초고왕 때(372년)의 일로 지금부터 1600여년 전의 일이다. 그 후 100여년간 인천지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인천의 영종도에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을 세워 중국 사신을 접대했다. 인천에서 출발해 덕적도와 옹진반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됐는데, 2~3일 정도에 횡단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라는 이점이 있었다. 인천이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서해로 빠지는 한강 하류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전통적인 해상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이곳은 현재 월평균 인파 20만 이상이 찾는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변모했다. 어찌 보면 이곳이 한국 화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었다.

▲청관(淸館)의 탄생과 번성
바닷물이 닿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다는 화교.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상인 40여명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교역을 한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청나라는 인천이 개항한 해인 1883년 말부터 영사(領事)를 두었고 이로부터 인천에 중국인들이 내항했다. 1년 뒤 선린동 일대의 구릉지대 약 5000평 규모의 청국조계(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구역)가 설정되면서, 화교의 이주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출입관리를 위해 청국영사관 등을 위시한 관리들이 인천에 거주했고, 외국인들도 대거 입국했다.

초기 5명의 청국인이 인천세관 뒤편에 거주하면서 식료품, 잡화류의 수입과 해산물의 본국 수출을 주업으로 했다. 또한, 영국, 미국, 러시아 각국의 함선이 입항했을 때 식량과 용수의 공급을 도모하는 등의 업무를 맡아 보았다. 지금 '인천화교소학교'가 있는 자리에는 이사부(理事府)라는 이름의 영사관이 있었는데 '청나라의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개항 후 10년이 되지 않아 500여명이 넘는 중국인이 인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현 파라다이스호텔로 향하는 언덕길 양쪽이 그 시가지였고, 북성동사무소가 있는 큰길이 그중 번화가였다. 당시 주요 상인이었던 의생호는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조선의 총지점으로 서구의 잡화, 양주, 식료품, 화장품 및 중국산 직물과 잡화 등의 도매와 소매를 하고 있던 역사 깊은 상점이었다. 또 잘 알려진 동순태(同順泰)도 한성과 상하이를 잇는 무역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에는 청나라 거상들의 큰 점포가 줄지어 서 있고 그 뒤로는 여관, 잡화상, 음식점,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거기에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 청요리집들이 서울 장안에까지 회자돼 이곳의 음식을 먹기 위해 내려오곤 했다.

1920년대에 이르면 인구는 1800여명으로 증가하고 중국 무역액의 8할을 이들이 좌우했다. 이는 화교상들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천항을 본거지로 활용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곳은 흰 벽과 붉은 기둥이 옹기종기하고 청요리집이 즐비했으며, 다양한 계층의 손님이 경인철도를 타고 이곳에 와서 한잔 마시고 가는 것이 당시 서울 멋쟁이들의 풍류였다. 또한, 중국 상품뿐 아니라 서양의 양품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나갔다. 특히 설 명절 때의 청관 놀이는 대단했다고 한다. 집집마다 긴 장대에다 폭죽을 수백개씩 매달아 연쇄 폭발케 해 눈과 귀를 현란케 하고 높은 나무다리를 타고 삼국지나 서유기의 인물 탈을 쓴 가장행렬은, 인천에서 자란 사람들의 가장 인상적인 추억거리였다고 향토의 원로들은 말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으로 비상
청관은 1930년대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위세에 밀려 쇠락하기 시작했다. '선린동'이라는 이름은 광복 직후 1946년 붙인 것으로 이름 그대로 '중국인들과 옛날과 같은 친선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이었지만 1950년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정부는 화교의 외환 거래규제, 무역규제, 거주자격 심사 등을 강화했다. 때문에 이곳의 경제적 활동은 빠르게 위축·쇠퇴하게 되어 갔고, 거기에 더해 1974년 인천 항만의 확장과 함께 인천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이전함에 따라 청관의 지역적 기반이 흔들리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 한중 수교를 계기로 특히 인천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개항장 지역의 역사와 근대 문화유적이 재조명되면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관광명소로서뿐만 아니라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국 내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했다. 곳곳에 세워진 중국식 패루(牌樓), 붉은 등과 기둥, 금박 입힌 용틀임상 등이 한눈에도 차이나타운임을 말해 준다. 여기에 중국식 전통공원, 중국문화 체험시설, 삼국지 벽화거리, 중국어 마을, 짜장면박물관 등은 인천 차이나타운을 찾고 싶은 명소가 되게 했다.

그러나 연간 방문객 300만명이 찾는 이곳이, 1859년에 조성된 일본 요코하마의 중화가(中華街)와 비교되는 것은 그 역사의 길고 짧음에 있는 것만은 아닐 듯하다. 한국속의 작은 중국을 품격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계속되어져야 할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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