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16-양관
근거없는 '복원 주장' 빈축 사기도
근거없는 '복원 주장' 빈축 사기도
인천감리서는 과거 도호부가 수행해 왔던 지방행정 기능 이외에 외국 선박의 입출항, 해관(海關ㆍ세관) 사무, 출입국 업무 등을 맡아 보았는데, 이 같은 관아의 확장과 이전은 지역사 변천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가장 두드러졌던 대목은 '근대(近代)' 와의 접촉이었다.
인천도호부 시절, 인천의 인구는 채 1만여명이 안 되었고, 주업은 농사였으며 향교와 서당이 유일한 교육 기관으로서 기능하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개항장이 된 제물포에서의 사회적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등대지기, 호텔 종업원, 우체부, 전화 교환수, 성냥공장 여공, 부두 노동자 등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식 일자리가 생겨나는가 하면, 지금의 중구청 일대 언덕바지에 서양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첫 건물은 현 맥아더 동상 인근에 있었던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독일 함부르크가 본사인 '마이어 무역상사'의 한국명이 '세창(世昌)'이었는데, 지사장 있었던 에두아르트 마이어가 직원들의 사택을 각국공원(各國公園) 정상에 세운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벽돌 건물이었는데 그 모습이 근사했다고 한다.
한옹 신태범 박사가 유저 '인천 한 세기'에서 "건평 170평이 넘는 화사한 크림색 건물이었다. 사각형 망루, 아치형 네모 기둥, 빨간 기와가 미적 효과를 돋보이게 했다."고 소개한 그 건물이다. 광복 직후 인천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함포에 회진되었다.
그간 우리 손으로 부순 근대 건축 유산만 해도 존스톤 별장, 러시아영사관, 대불호텔 등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이제 와 별 근거도 없이 '복원'을 하자는 섣부른 주장을 한다. 문화적 수치다. 남아 있는 건물이라도 잘 보존하는 것이 오늘 할 일이라고 본다.
/조우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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