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16-양관
근거없는 '복원 주장' 빈축 사기도
▲ 세창양행 사택과 개항 초기의 제물포. 응봉산 정상에 세창양행 사택이 보인다.
인천 제물포가 개항된 것은 1883년이다. 그에 따라 지금의 남구 관교동에 있던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가 설치 5백여년 만에 폐지되고, 대신 개항장으로 정해진 제물포(지금의 중구 내동)에 현 시청 격인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라는 이름의 새로운 관청이 들어섰다.

인천감리서는 과거 도호부가 수행해 왔던 지방행정 기능 이외에 외국 선박의 입출항, 해관(海關ㆍ세관) 사무, 출입국 업무 등을 맡아 보았는데, 이 같은 관아의 확장과 이전은 지역사 변천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가장 두드러졌던 대목은 '근대(近代)' 와의 접촉이었다.

인천도호부 시절, 인천의 인구는 채 1만여명이 안 되었고, 주업은 농사였으며 향교와 서당이 유일한 교육 기관으로서 기능하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개항장이 된 제물포에서의 사회적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등대지기, 호텔 종업원, 우체부, 전화 교환수, 성냥공장 여공, 부두 노동자 등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식 일자리가 생겨나는가 하면, 지금의 중구청 일대 언덕바지에 서양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첫 건물은 현 맥아더 동상 인근에 있었던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독일 함부르크가 본사인 '마이어 무역상사'의 한국명이 '세창(世昌)'이었는데, 지사장 있었던 에두아르트 마이어가 직원들의 사택을 각국공원(各國公園) 정상에 세운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벽돌 건물이었는데 그 모습이 근사했다고 한다.

한옹 신태범 박사가 유저 '인천 한 세기'에서 "건평 170평이 넘는 화사한 크림색 건물이었다. 사각형 망루, 아치형 네모 기둥, 빨간 기와가 미적 효과를 돋보이게 했다."고 소개한 그 건물이다. 광복 직후 인천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함포에 회진되었다.

그간 우리 손으로 부순 근대 건축 유산만 해도 존스톤 별장, 러시아영사관, 대불호텔 등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이제 와 별 근거도 없이 '복원'을 하자는 섣부른 주장을 한다. 문화적 수치다. 남아 있는 건물이라도 잘 보존하는 것이 오늘 할 일이라고 본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