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정체성 찾기] 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13) 엄마 손으로 장만한 겨울용 털실 옷
▲ 월동 대비 집안일이었던 뜨개질은 1970년대에 접어들자 보세가공 수출품목이 되면서 중요한 부업거리가 되었다. 사진은 1966년 인천시에서 주관한 편물강습회의 모습.
물자 부족하던 시절 주부들 가내수공업 활성화

털실가계 성업 … 신포동 '송현모사' 아직도 영업



찬바람이 불면 따스한 털실 옷이 그리워진다. 예전에 뜨개질은 의(衣)식주 해결의 하나였다. 섬유·의류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겨울옷은 주로 주부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돈을 주고 옷을 사기보다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 입는 손뜨개질 옷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이 크면 털실을 풀어 다시 몸에 맞게 뜨개질해서 입혔다. 첫째 아들이 입었던 옷을 막내 여동생용으로 다시 고쳐 뜨곤 했다. 옷뿐이 아니었다. 장갑, 양말, 모자, 목도리 심지어 가방까지 온갖 '엄마표' 털실 제품이 만들어졌다.

손뜨개질은 일제강점기에도 성행해서 주로 부유층 주부들을 대상으로 강습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내리 44번지에 있는 인천가정편물연구회에서는 1932년 10월에 2주간의 편물강습회를 개최했다. 수강 과목은 자켓, 조끼, 스웨터, 남녀 아동복이며 강습비는 1원이었다. 비슷한 시기 인천수예연구소에서도 유사한 내용으로 모사편물강습회를 열었다.

6·25 전쟁 후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손뜨개질은 더욱 중요한 가사(家事)가 되었다. 이 뜨개질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접어들자 집안일에 머무르지 않고 주부들의 부업거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 주부가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부업을 갖는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그즈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털실 옷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손으로 직접 뜬 털실 스웨터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보세가공 수출품목이 되었다. 특별한 기계설비 없이 바늘과 실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이 가내수공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농촌지역에서 조차 겨울철 농한기에 남자들은 가마니를 짜고 여자들은 스웨터를 짰다. 나중엔 여름철 농번기에도 털실 옷을 뜰 만큼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전국의 부녀복지회관이나 야간기술학교를 중심으로 편물 강습회가 자주 열렸다. 1960년대 인천에서도 가사원(家事院) 인천지부에서 편물강습을 정기적으로 실시했으며 수료한 4000여명의 회원들은 각자 집에서 편물 가공품 생산에 종사했다.

1966년 5월30일 대한어머니회 인천지부가 주최한 수출편물강습회에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해 수강생들을 격려할 만큼 당시에는 편물 수출이 국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은 1960년대 중반 인천시 차원에서 '동네 대표' 주부들을 모아놓고 뜨개질 무료 강습을 하는 모습이다.
맡길 데가 없어 아이를 둘러업고 나왔지만 엄마는 아랑곳 않고 강사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이다. '신기술'을 익힌 엄마들은 동네로 돌아가 이날 배운 기술을 이웃들에게 전수했을 것이다.

1966년 국내에서 첫 국내 기능올림픽이 열렸다. 이듬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었는데 첫 국내 기능대회부터 손뜨개질 종목이 포함되었다.

각 지역의 손뜨개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가대표를 선발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매번 좋은 성적을 거두자 해외에서는 우리나라 여성의 손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이민이나 유학을 가는 여성들이 뜨개질 기술을 익혀 가는 경우가 많았다.

신문에 1, 2개월짜리 속성 과정의 양재·편물학원 광고가 자주 실렸고 뜨개질 강습 기사가 연재돼 인기를 끌었다. 대부분의 여성잡지사는 아예 별책부록으로 '편물가이드'를 발행해 잡지 판매에 큰 재미를 보기도 했다.

인천의 시장 어귀마다 털실 가게 한 두 개씩은 있었다. 특히 현재 동인천역 북광장 인근에 '○○ 모사' 간판을 단 10여개의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중 1962년 문을 연 송현모사는 주부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몇 년 전 북광장이 조성되면서 이 가게는 현재 중구 신포동으로 둥지를 옮겨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