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2. 60~70년대 최고의 취업 스펙은 주산 실력
▲ 1970년대 인천상의가 주관한 주산경기대회의 모습. 당시 인기직장이었던 은행에 들어가려면 보통 2급 이상의 주산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1946년 全인천주산경기대회

해방 이후 첫 기능보급행사


산업화 시기 필수 사무용품

전자기기에 밀려 내리막길



취업시즌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직장을 얻기 위해 영어, 컴퓨터, 봉사활동 등 갖가지 스펙 쌓기에 온 힘을 쏟는다. 30여년 전까지만해도 고용시장에서 우대받는 취업 스펙 중 하나는 주산 실력이었다.

개항장 인천은 다른 도시에 비해 일찍 근대적 상점과 회사가 많이 설립되면서 주산이 활성화 되었다. 1924년 2월3일 인천주산경기회와 인천남상업학교 주최로 부내 상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은행원, 상점원 등이 참가한 주산경기대회가 열렸다. 속산(速算), 전표산(傳票算) 등 9개 분야에서 실력을 겨뤘는데 주로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에 근무하는 현직 은행원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20년대 후반 유도 사범 유창호는 당시 인천의 유지 최승우, 김윤복의 도움을 받아 율목동 유도관 2층에 인천 최초의 주산·부기 학원인 상업전수학교를 개설했다. 후에 이 학교는 동산중학교로 승격했고 더 나아가 동산고등학교로 성장했다. 1936년부터 인천부(현 인천시)와 인천상공회의소는 공동으로 매년 2주간 매일 밤 두 시간 동안 인천공회당에서 상점실무강습회를 열었다. 부내 각 상점 1명씩 총 50명을 대상으로 주산, 부기, 상사요항(商事要項)을 가르쳤다.

광복 후 인천은 우리나라 주산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인천상의 11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인천상공회의소는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전(全)인천주산경기대회를 개최했다. 1946년 10월26일 실시한 제1회 대회는 8·15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기능보급행사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주산경기대회의 효시였다. 1949년 제4회 대회를 치르기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해 왔으나 6.25 전쟁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다.'

인천 출신 주산인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1960년 10월8일 문교부 주최 제6회 주산능력검정고시가 서울상고와 덕수상고에서 응시자 5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그들 중 인천송현국민학교 6학년생 전숭영(12) 양이 역대 최연소로 2급에 응시, 언론에 주목받기도 했다. 1965년 5월 일본, 자유중국, 마카오, 멕시코 등이 참가한 제3회 세계주산회의가 경희대 강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인천여상 강인구 교사가 '주산기능에 미치는 요인 분석'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이듬해 12월 자유중국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일 세계주산대회에는 이봉운 인천상의 부회장이 대표단 단장을 맡아 참가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판은 필수 사무용품이었다. 은행 창구나 관공서 책상은 물론 동네 어귀 구멍가게 계산대 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1950년대 상업학교에서 주산은 의무 교육이었고 60년대 초·중학교에서는 특기교육과정이 되었다. 신학기 학교 앞 문방구의 대목 학용품으로 주판이 낄 정도였다. 한창 때는 전국 10여개 공장에서 생산하는 주판이 한해에 10만개씩 팔리기도 했다. 골목마다 주산학원이 들어섰고 아이들은 한글과 구구단을 깨치기 전에 조기교육으로 주산을 배웠다. 엄마가 만들어준 다양한 색상의 천주머니에 주판을 넣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주산자격증은 확실한 '취업증명서'였다. 1973년 중구 사동에 있는 경기은행 본점에서 상고 졸업자를 대상으로 남자행원 약간 명을 모집했는데 고시과목은 주산, 부기, 종합상식, 작문이었다. 당시 인천상의는 전국주산경기대회에서 입상한 지역 실업계 학생들에게 시내 기업체 취업을 알선해 주었다. 실업계고 주산부 학생들이 거둔 성적에 따라 그 학교의 위상이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했으며 각 시도의 선거종합상황실 투개표 상황집계는 상업고 주산부 학생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전자계산기가 일상화되면서 주산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대한상의 주관 1988년도 주산국가기술자격검정에 111만명이 응시한 것을 정점으로 '주판알 튕기는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