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인천 연안 - 도성 '외적 상륙 차단'
[인천일보 연중기획] 인천 연안 - 도성 '외적 상륙 차단'
  • 김진국
  • 승인 2014.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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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4> 개항기 부평지역의 방위(防衛)
▲ 해동지도 부평부.
고종(1863~1919) 초 계속되는 이양선의 출몰과 두 차례에 걸친 서양함대의 침략은 조정으로 하여금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연안 방비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특히 1875년 영종도가 함락되자 강화도와 영종도를 거점으로 하는 연안 방비책이 무너짐에 따라 수도 한양 가까이에서 외적의 도발을 방어할 진지의 구축은 너무나 당연히 요구되어 지는 상황이었다.

▲연희진(連喜鎭) 설치
인천·부평 연안의 방비 축조는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를 공역감동당상(工役監董堂上)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됐는데 포대 축조에는 석질이 좋고 단단하다고 알려진 강화도의 석재를 채취해 사용했다. 이러한 결과로 영종진 파괴 후 방어영으로 승격된 인천부의 방위력 강화를 위해 1879년(고종 16) 7월1일 두 진과 그 소속의 여러 포대의 축조가 완성됐는데, 인천의 신설 진은 화도진(花島鎭), 부평의 신설 진은 연희진(連喜鎭)이라고 명명했다.

부평 해안에 설치됐던 연희진 관할의 포대들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간 조사된 바에 따르면 5~7개의 포대가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희진에 소속된 포대는 연희동 용두산 인근에 용두포대(연희포대)라 불리던 포대가 3군데 축조됐고, 가정동 봉우재에는 가정포대라 불리던 포대, 원창동에 2군데, 가좌동에는 가좌포대가 각각 축조돼어 모두 6개의 포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그나마 석축이라도 있었다고 전해지는 포대는 용두포대와 봉우재에 있었던 가정포대뿐이며, 나머지 포대는 이름만 전할 뿐이다.

인천 연안에서 도성까지 최단거리에 있는 육로는 부평로이다. 부평로는 도성을 출발하여 양화진에서 한강을 건너 철곶포(지금의 양평동)에 도착한 뒤 고음달내현(지금의 화곡동)을 지나 부평에 도착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도성을 거치는 전국의 대로 중에서 강화대로의 경우 전 구간 내에 해발 100m 이상의 구릉지가 없기 때문에 일단 인천 연안, 특히 '적'이 부평지역에 상륙해 도성으로 향한다면 최단 시간에 도성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지리적 조건에 따라 부평지역에 연희진이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비에도 불구하고 1880년(고종 17) 강압에 의해 인천의 개항이 결정되자 화도진과 연희진의 기능과 역할이 쓸모없게 됐고, 급기야 1882년(고종 19) 6월28일 연희진은 혁파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으로 이속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됐다. 일본 및 외국선박의 상륙을 저지하고 연안방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연희진은 창설된 지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본연의 기능을 상실케 됐던 것이다.

▲중심성(衆心城) 축조
연희진이 혁파된 지 1년이 지난 1883년(고종 20) 10월 구 연희진에서 부평도호부로 향하는 길목인 계양산 경명현(景明峴)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했다. 계양산 경명현은 징매이고개라고 불리워지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한강 하류 서편에 펼쳐진 평야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한강 하류가 감싸는 듯한 형국을 하고 있어 예로부터 서해의 관문으로 교통과 군사상의 요지로 여겨졌으며 한양으로 통하는 전방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경명현은 삼국시대부터 남북을 통과하던 통로로 교통의 요지였고, 천연적으로 형성된 군사기지인 계양산성이 있으며 중국대륙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아주 중요시했다. 중심성이 위치한 경명현은 부평도호부 관아가 있던 부내면과 해안가 고을인 모월곶면의 경계에 있는데, 중심성은 조망이 양호해서 서쪽으로는 해안선이 넓게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인천시내와 한강 하류까지 관측할 수 있었다.

경명현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길목에 폐쇄된 연희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도 중심성의 축성 과정에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중심성은 부평 연안에 상륙해 부평부에 이르는 육로 중 통행량이 가장 많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고, 부평 해안-부평도호부-(서울)도성을 잇는 육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적지였던 것이다. 거기에 부평 해안에서 도성까지의 거리는 서해 연안의 고을 중 가장 가까운 70리에 불과했다. 도성에 대한 외곽 수비가 강화도에서 영종도 그리고 인천 연안지역에서까지 수포로 돌아가자, 중심성은 수도 방어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기능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성의 서쪽에는 장대(將臺)를 두어 병사를 조련했고 군기를 중수했으며, 해안의 포대에 병사를 재배치해 연안방비를 강화했다고 돼 있다. 새로 축조한 성의 명칭을 '중심성(衆心城)'이라 했는데 이는 부민들의 정성을 모아 쌓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 설치
당시 서해안 지역의 해안 방어는 각 영문에서 나눠 관할되고 지휘체계가 나눠 있었기에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부평 연해의 관문으로 쌓은 중심성도 그 중 하나로 축성을 통해 부평지역의 해안방어 체제를 재정비하고 궁극적으로는 도성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해 유사시를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884년(고종 21) 1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부평에 설치해 경기도 연해지방의 방비를 담당하게 했다. 기연해방사무(畿沿海防事務)에는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영목(閔泳穆)이 임명됐고, 해안을 방어할 병사와 포군(砲軍)의 조련을 관장했다.

기연해방영의 영문(營門)을 부평도호부에 설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헌기록이 없어 조금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저간의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다른 연해 고을에 비해 도성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 중앙의 통제가 용이했다는 점과 경기와 황해도에 이르는 영문 관할지역의 중앙에 부평이 위치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해안 방어사령부가 후방 육지로 밀려 들어온 것은 다른 한편으로 새로 신축한 중심성에 대한 특별한 지원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885년(고종 22) 3월 서울 용산의 만리창(萬里倉)으로 영문이 이설되기까지 부평지역은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과 육군을 통제하면서 경기 연안의 해방(海防)을 담당하는 전략적 기지로서 기능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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