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3> 왕도(王都)의 공간 인천 ② - 江都時代
▲ 12~13세기 동아시아 정세.
▲ 강화도 간척사업.
인천의 역사적 특징으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왕과 관련된 상징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비류백제의 출현이 바로 미추홀이었고, 특히, 고려시대에는 인천이씨 출신의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7대 80년에 걸쳐 왕의 고향이자 왕비의 고향이었던 곳이다. 여기에 강화도가 몽골의 침입을 맞아 제2의 수도로서 39년간 항몽(抗蒙)의 근거지가 됐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13세기 고려의 대내외 정세
고려왕조가 최충헌(崔忠獻) 일가의 무신집정기(武臣執政期)에 접어든 직후인 13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몽골(蒙古)의 출현으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됐다. 만주 서북부의 유목민족이었던 몽골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 테무진(鐵木眞, 후에 징기스칸으로 추대)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사방의 여러 나라를 정복해, 1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대정복제국을 건설했다.

▲12~13세기 동아시아 형세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목적으로 침입한 것은 고종 18년(1231)의 일이며 이후 고종 46년(1259)까지 총 6차에 걸쳐 약 30년 동안 계속됐다.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 들어온 것은 고려 고종 18년의 일이나, 그보다 앞선 고종 5년 거란 유족에 대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고려에 입경한 것이 침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즉, 거란 유족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건국해 몽골과의 결별을 선언하자 1216년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연합해 협공을 시작했는데, 거란 유족이 협공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고려 경내에 진입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다가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해 장기전 상태에 있었다(1218). 이에 몽골군도 거란 유족을 쫓아 고려로 진입하게 됐으며, 고려를 구원한다는 구실로 고려·몽골·동진 3국의 연합군을 결성해 마침내 1219년 강동성을 함락시키고 거란 유족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은 '형제맹약(兄弟盟約)'의 체결로 이어졌는데, 이후 몽골은 이 조약을 내세워 과다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는 등 갖가지 횡포를 자행해 결국 양국간 분쟁의 불씨가 됐다.

제1차 침공이후 물러났던 몽골군이 재차 침공하려 할 즈음 고려 조정은 수도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전시(戰時)의 새로운 도읍지로 산간 내륙 지방이 아닌 강화도가 선정된 것은 전적으로 최우의 의도였다. 즉, 제1차 여·몽전쟁이 지속되고 있던 고종 18년(1231) 12월에 최우는 승천부(昇天府)의 부사(副使) 윤린(尹璘)과 녹사(錄事) 박문의(朴文璇)로 하여금 피난지로서 강화도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 보고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도입보(海島入保)'를 최적의 방책으로 고종 19년(1232) 7월에 강화도로 입도한 이래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기까지 고려는 39년간(1232~1270)의 '강도시대(江都時代)'를 열게 된다.

▲수도 개경의 축소판 '강도시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궁궐과 관해 시설과 함께 방어(防禦) 시설의 축조 또한 활발히 이뤄졌는데, 바로 강도(江都)를 둘러싼 성곽(城郭)의 축조가 주된 역사(役事)였다. 강도의 성곽은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중첩(重疊)해 쌓았는데, 내성의 위치는 현재 남아있는 강화산성(江華山城)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강화도 간척사업
고려 조정의 강화 천도는 궁궐·관아 및 성곽의 축조라는 대역사(大役事)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강화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가장 큰 것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였다. 대규모 건설에 따른 역부(役夫)의 징발·이주가 있었고, 특히 왕족·문무 관리·이속(吏屬)·군졸 및 그 가족·식솔도 적지 않게 이주했다.

한편, 갑자기 늘어난 인구의 식량 조달은 강도시대 조정의 심각한 과제였다. 초기에는 개경이 지리적으로 근접했기에 주로 개경으로부터 경제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병란으로 인해 지방으로부터의 조세 징수가 어렵게 되자 대규모 간척(干拓)사업과 이주민들의 신전(新田) 개간으로 이뤄졌다.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조정은 팔만대장경을 조성함으로써 정신적으로 국민적인 결집을 유도하고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재조대장경 혹은 고려대장경이라 불리는 팔만대장경의 조판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이(崔怡)의 주도로 강화 천도 2년 후인 고종 23년(1236)에 시작돼 그 아들인 최항(崔沆)이 집권하던 고종 38년(1251)까지 무려 16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완성됐다.

▲남북교류의 학술적 공감지대 '강화'
고려 조정의 천도와 더불어 신도(新都)로 건설된 강화도는 대몽항쟁을 고수하며 정권을 지속시켰지만, 최의가 고종 45년(1258) 문신 유경(柳璥)과 무신 김준(金俊) 등에 의해 제거되자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문신들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면서 개경으로 옮겨가게 됐다. 몽골은 화의의 조건으로 출륙 환도(還都)와 함께 항쟁의 상징인 강화산성(내성)과 외성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했고, 고종 46년(1259) 6월 내성과 외성이 헐리게 됐다.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해상교류의 거점으로, 또, 국방상의 요지로 중추적 역할을 했고, 고려 후기 제2의 수도로써, 왕도(王都)이자 왕실의 보장처의 기능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꾸는 인천은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남북교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또 하나 학술적 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