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 13 오포
1925년 소방소 감시탑 사이렌 시보 대체
▲ 오포 발사 장면과 홍예문 위의 소방소 감시탑 .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이종복 황금가지 대표
지난 1일부터 백화점과 일부 상점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환한 불을 밝혔다. 때 이른 크리스마스 분위기 연출은 연말연시 매출을 위한 상업적 전술이지만, 또 한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다는 세모의 정서와 함께 유년시절 무시로 듣던 답동성당의 종소리를 연상케 한다.

1950년대 말, 인구가 30여 만 명에 불과했던 때의 인천은 중구 일원이 중심가였는데, 전원도시처럼 조용했다. 그때 시가지 전역에서 들을 수 있던 답동성당의 종소리는 종교적 의미와 함께 시보(時報) 역할도 했다. 시계가 드문 때라 시민들이 그로써 시각을 알았던 것이다.

시보의 원조는 조선 예종 때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린 것이라 한다. 그 후 사회가 발달하자 생업 활동이 왕성한 낮 시간을 나누어 백성들에게 휴식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헛 대포 한 방을 공중에 대고 쏴서 정오를 알렸는데 그를 '오포(午砲)'라 했다.

오포의 역사는 생각보다 꽤 오래다. 로마 때 시작돼 2차 대전 때 중지됐다는 것이 통설이고, 우리나라에서 상시 제도화한 것은 인천이 최초이다. '인천부사'는 1906년 2월 9일부터 오포제를 실시했다고 전하고 있고, 전국 오포제는 1910년에 시작됐다는 게 공식 기록이다.

지금의 인천기상대 앞쪽 산허리 숲속에 있던 오포는 사고를 내는 일이 잦았다. 실수로 관측소 오포수가 손가락을 잃는가 하면, 제때에 쏘지 않아 빈축을 사기도 했다. 말썽 많던 오포는 1925년경 홍예문 위 인천소방소 감시탑에서 울리는 '사이렌' 시보로 대체되었다.

광복 후에는 정오 대신 자정에 사이렌을 울렸다. '통행금지'를 알렸던 것이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시민들은 매일 '공습경보' 같은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밤을 맞았다. 그것이 청소년의 귀가 시간을 알리는 '사랑의 종소리'로 바뀐 것은 통금이 해제된 1982년 5월 이후의 일이다.

디지털 세상이 된 오늘날엔 공중 대상 '시보' 자체가 의미 없게 됐다. 귀물이던 시계가 지천으로 흔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TV와 라디오가 생뚱맞게 '시보'을 내보내고는 있지만, '땡' 하는 기계음 소리가 무미건조한 시대를 상징하는 듯싶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