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 - 12 - 기상 관측
日·英과 자료 교환 … 전후 서울로 옮겨가
▲ 옛 인천측후소. 기상청은 남아있던 본관 건물마저 헐어버렸다.
아침저녁으로 날이 선선해졌다. 일기예보에 더 귀를 기울이는 계절이 돌아왔다. 그간 대한민국의 핵심 대도시 '인천'을 빼고 일기예보를 진행해 온 일부 몰지각한 TV 방송들이 아시아경기대회 개최 후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다행스럽긴 하지만, 아직도 3백만 인천 시민을 안중에 두지 않는 방송들이 있어 더 두고 볼 일이다.

일기예보 담당 PD들이나 그 캐스터들, 나아가 국립중앙기상대의 예보관실 등이 우리나라 기상 관측사의 상식만 알았어도 그 같은 염치없는 '프로그램'은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기상관측에 관한 한 인천은 역사적 기득권을 지니고 있다. 국내 최초로 근대적 기술을 이용해 기상을 관측한 곳은 서울이 아니라 인천이었다.

지금의 제물포고교 뒤 응봉산 정상에 인천측후소가 세워진 것은 1905년 1월. 원래 황실 재산이었던 부지에 풍력계, 지동계, 온도계와 백엽상 등을 설치했고, 후에 국내 최초로 천체망원경까지 구비한 소규모 천문대도 세웠다. 측후소에서는 매일 3시에 일기예보와 정오 시보를 내보냈고, 서울 등 전국 12개 지역의 측후소를 관할했다.

인천측후소는 일본 중앙기상대,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교환했던 명실상부한 기상관측의 선구지였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광복 후인 1945년 9월 정부가 인천기상대를 국립중앙관상대로 재발족시켰는데, 1953년 이를 갑짜기 서울로 옮겨가 버렸다. 원조 국립관상대를 하루아침에 지역측후소로 축소시켜버렸던 것이다.

그 후의 세대들은 영욕이 뒤엉킨 인천기상대의 발자취를 모른 채 일기예보에서 '인천'을 도외시하고 있었고, 기상청은 제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옛 인천측후소의 원통형 이색 건물을 비좁단 이유로 하루아침에 헐어버리고 말았다.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역사적 기득권의 무시이자, 유적의 파괴였다.

이를 방송과 관(官)이 주도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면서 남의 역사왜곡을 탓하고 있는 몰골이 말이 아니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