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9>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인천팔경
▲ 엽서에 등장한 괭이부리의 팔경원.
회화(繪畵)에서 출발한 팔경(八景)이 시(詩)의 소재로 확장됐다가 그것이 점차 퇴색돼 승경(勝景) 혹은 절경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특정 지역의 ○○팔경은 '경물명(景物名)' 또는 '지명[경물] + 그 景觀(혹은 행위)'로 표현돼 해당 지역의 절경으로 명명됐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전하던 인천팔경들이 있다.

鼎足の山정족산
漢江の水한강물
瓦釜丘の月와부 언덕의 달
花島の雪화도진의 눈
月尾島の花월미도의 꽃
八尾島の朝霞팔미도의 아침 노을
沙尾島の夕照사미도의 석양
華開洞の夜色화개동의 야색

<신찬 인천사정>(1898년)에 전하는 인천팔경이다.

자연물에 해당하는 산, 강, 언덕, 섬 이외에 특이하게 '야색(夜色)'이 등장한다. 여기서 화개동은 敷島町(현재의 신선동)과 花町(현재의 신흥동)이 통합되기 전의 洞名으로 유곽이 번성했던 공간이었다. 흔히 화개동이 '갈보(蝎甫)'와 연동돼 나타나는 신소설 <모란병>(이해조, 1911년)과 <해안>(최찬식, 1914년)의 경우를 보더라도 화개동은 야색을 연상케 하는 동네이다.

저자는 '인천을 알고자 하는 일본인은 이 책을 통해 대강의 개요라도 알면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고 책의 서문에 밝히고 있다. '야색'을 팔경으로 선정한 것을 통해 인천에 대한 저자의 불온한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

漢江ノ歸帆한강의 돌아오는 배
花島ノ秋月화도진의 가을 달
朱安ノ落雁주안의 낮게 나는 기러기
永宗ノ夕照영종도의 석양
江華ノ晴嵐강화의 맑은 아지랑이
月尾ノ夜雨월미도의 저녁비
桂陽ノ暮雪계양산의 저녁 눈
畓洞ノ晩鐘답동성당의 저녁 종소리

<인천향토자료조사사항>(1915)에 있는 인천팔경이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재 창영초등학교) 조선인 교사들에 의해 조사된 문건이다.

인천의 명승지를 소개하면서, 괭이부리[猫島] 위의 언덕에서 近江八景을 감상할 수 있다며 그곳이 '팔경원'이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천 개항 이전 한국 선박의 정박장이었던 만석동과 북성포 간의 만내를 1905년 7월에 매립하여 1906년 9월 준공하면서 언덕 위 명승지에 정양여관을 건설해 팔경원이라 지칭하였다'고 한다.

팔경원의 위치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한강 하구 쪽, 화도진, 주안, 영종, 강화, 월미, 계양, 답동성당을 제시하고 있다. 주안과 기러기의 결합은 염전의 개발(1907년부터)과 관련돼 있는 듯하다. 성당의 종탑이 1896년 완성된 이후, 저녁 종소리는 주변사람들에게 청각을 자극하는 낯선 경험이었을 것이다.

永宗의 歸帆영종도의 돌아오는 배
花島의 晴嵐화도진의 맑은 아지랑이
月尾의 秋月월미도의 가을 달
聖堂의 晩鐘성당의 저녁 종소리
猫島의 夕照묘도의 석양
鷹峰의 暮雪응봉산의 저녁 눈
朱安의 落雁주안의 낮게 나는 기러기
砂島의 夕雨사도의 저녁 비

'동아일보'(1923.12.1.)에 전하는 인천팔경이다.

제시된 곳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은 중구이다. 중구를 중심으로 했을 때의 인천팔경인 셈이다. 현재 사도는 매립됐지만 중앙동 해안 가까이 위치했던 섬이다. <신찬 인천사정>(1898년)에서 사미도의 석양(沙尾島の夕照)으로 등장했던 섬이 그것이다. '사도에서 저녁 비를 맞는 것'이기보다는 '밤비 내리는 날 해안에서 사도 바라보기'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감상자는 저녁 빗소리와 함께 사도 뒤쪽의 월미도 야경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묘도(猫島, 괭이부리)는 팔경원이 위치한 공간으로 夕照를 감상하기에 적소였고, 응봉은 자유공원(각국공원, 1888년 완성)이 있는 응봉산이다.

결국 현재의 행정구역 기준으로 보면 남구가 한 개, 중구가 다섯 개, 동구가 두 개인데 이는 팔경을 선정한 자의 생활공간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