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9 해군사관학교

군함·해사 도입 해군과 남다른 인연

인천은 삼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양서(兩西ㆍ황해도와 평안도)와 삼남(三南ㆍ충청, 전라, 경상도)을 호령하고 있는 형상이어서 예로부터 해방(海防)의 중요한 거점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제물진, 영종진 부설 등이 그 같은 사실을 대변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그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다. 인천도호부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인천감리서를 세운 조정은 1878년 지금의 동구에 수도 방어의 거점으로서 화도진(花島鎭)을 설치하고, 어영대장 신정희로 하여금 바다를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 강화 갑곶진 '조선수사해방학당' 생도들의 훈련 장면

1893년에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강화읍 갑곶진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건립했다. 이 학교는 교명 그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였다. 비록 1년 3개월간 존속했지만, 우리 해군사의 중대한 자취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1903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도입한 최초의 군함 '양무호(揚武號)'의 모항이 인천항이었고, 그를 이끌었던 신순성(愼順晟) 함장도 광복 직전 작고하기까지 인천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던 것은 널리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인천과 해군(海軍)의 인연은 광복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해군은 최초의 함정 편대 훈련을 1947년 8월17일 인천 앞바다에서 실시했다. 충무공정을 비롯해 11척의 함정이 참가한 이 훈련에서 해군은 자주적 해상방위의 의지를 눈물겹게 다졌다.

해군은 6ㆍ25전쟁 때에는 연합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휴전 후에는 수도권과 서해를 방어하는 제2함대사령부를 월미도에 주둔시켜 수많은 충무공의 후예들이 이곳에서 긍지를 갖고 국토방위에 임하도록 했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창설 후, 신순성 함장, 안병태 참모총장, 최초의 잠수함 함장 안병구 제독,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 윤영하 소령 등이 모두 인천인이었다는 것은 해군과 인천과의 인연이 가히 운명적이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