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7
김호순 인천인 최초 해외 올림픽 참가 … 국내외 대회 우승
벨로드롬 경기장 없어 국내선수 훈련열악·트랙시합 부진
▲ 벨로드롬이 없던 시절, 사이클 트랙경기는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육상 경기 하듯 경주를 했다. 코너를 돌 때 뒤엉켜 자전거끼리 부딪히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신문물 유입의 창구였던 인천은 자전거의 출현도 타도시보다 빨랐다. 조선인에게 자전거는 낯선 물건이었다.

개화기 초 선교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다리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자전거가 보급되었던 인천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전거경주대회도 빈번하게 열렸다.

자전거경주대회는 주로 화정(花町·지금의 중구 신흥동) 매립지에서 열렸다.

1925년 10월에 열린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에는 경성에서 손꼽히는 십여 명의 기생 선수들이 참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우편배달부와 양조장 혹은 냉면집 배달원들은 '인천자전거점원구락부'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조직하고 전조선남녀자전거경주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배달원과 선수의 구분이 모호했던 시절에는 자전거급 종별경기대회가 종종 열렸다.

코스 달리기 외에 물건을 싣고 달리는 실용운반 경주, 장애물을 피해 달리는 실용차 장애물 경주 등의 종목이 포함되었다.

광복 후 자전거경주대회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1946년 경향신문 주최 제1회 전국지역대항자전거경기대회가 열려 인천과 서울을 비롯해 수원, 군산, 목포 등이 참가했다.

아쉽게도 38선 이북의 도시들은 한 곳도 참가하지 못했다.

경향신문은 기사를 통해 '아직은 남조선만 거행하지만 앞으로는 문자 그대로 전 조선을 총망라해서 거행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6·25 전쟁 이후 인천은 도로경기의 출발지 혹은 결승점 역할을 했다.

전국체전 혹은 국가대표 선발전은 서울 중앙청을 출발해 인천까지 두 번 왕복(약 150㎞)하거나 그 역순으로 하는 것이 단골 코스였다.

대회 때마다 이를 지켜보기 위해 경인가도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걸출한 자전거경주 선수 한명이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천개항100주년사'에 의하면 김호순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15회 올림픽에 인천인 최초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다.

1956년 평화신문사 주최 인천-서울 간 자전거경주대회(86.6㎞)에서 1위를 했고 그해 열린 호주 멜버른올림픽 선발전에서도 우승, 당당히 태극마크를 다시 달았다.

연맹은 멜버른 도로경기가 아주 험난한 코스에서 치러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레이스가 펼쳐지는 코스에서 미리 훈련을 해야 좋은 성적이 나오겠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전지훈련을 갈 형편이 못되었다.

연맹은 도로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비슷한 코스를 인천에서 발견했다.

인천-주안 간에 한 곳, 주안-부평 간에 세 곳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주원고개와 원통이고개 등으로 추측된다.

선수들은 이 고개를 이용해 3, 4개월 동안 수없이 페달을 밟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기대주 김호순은 37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우리나라 사이클 실력은 전통적으로 도로경기에 강했다.

반면 벨로드롬 경기장이 없어 트랙경기에는 아주 약했다. 사진은 1973년 지금은 사라진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사이클 트랙경기의 모습이다.

경사진 길쭉한 타원형의 벨로드롬에서 시합을 해야 하지만 당시 그런 경기장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라 운동장 트랙에서 서로 부딪혀 가며 경주를 펼쳤다.

1982년 인천시는 남구 옥련동 194 일대 3만여 평 부지에 민자를 유치해 국내 최초로 관광객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전거전용 경기장을 건설키로 발표했다.

또한 대한사이클연맹은 88서울올림픽을 위한 재원 확보의 일환으로 우선 인천에 경륜장(벨로드롬)을 설치해 프로사이클을 실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와 관련해 당시 삼미슈퍼스타즈야구단을 운영하던 삼미그룹이 송도 부근에 1983년 봄 경륜장을 착공할 것을 구상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인천시는 1983년 10월 인천에서 열리는 64회 체전을 대비해 우리나라 최초로 계산동 체육공원 안에 국제규모의 벨로드롬을 건설해 개장했다.

이는 당시 효창인조잔디축구장과 함께 80년대 한국 스포츠의 두 명물로 꼽혔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