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4
차관 도입문제 따라 개최 지연 … 재원부족·지반침하 등 공사 어려움도
개통한 지 46년만에 경인고속도로가 '직선화' 된다.

오는 28일 서인천나들목에서 청라국제도시까지 총길이 7.49㎞가 개통되면서 곧게 펴진다.

경인고속도로 건설은 광복 후 여러 형태로 몇 차례 입안됐으나 번번이 예산문제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다.
1966년 정부는 국토균형 개발. 공업지대 분산. 도시인구 분산, 안보상 국방도로 필요성 등을 내세우며 대국토건설계획의 일환으로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했다.

세계는 이미 컨테이너 시스템으로 기계화된 운송 수단이 등장했고 국내에서도 화물트럭이 점점 대형화 추세에 있는 등 물류 차원에서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철도 하나를 개설하는 예산으로 고속도로 3개를 개통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일부 신문은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달리면 운전자의 피로도가 덜어지면서 교통사고가 감소하고 교통 쾌적도가 높아져 사회가 한결 명량해질 것이란 기사를 실었다.

심지어 고속도로가 많이 만들어지면 사투리도 순화될 것이라는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두 고속도로 건설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고속도로를 '부자들이 기생들 끼고 놀러나 다닐 길'이라고 폄하했다.

사진은 1967년 5월27일 오전 11시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인고속도로 기공식 장면이다.

정일권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시민 3만 여명이 모여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그 내막을 보면 결코 잔치 분위기라고 할 수 없었다.

기공식은 차관 도입 문제 등으로 네 차례나 연기한 끝에 개최되었다.

기본조사 조차하지 못한 채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6월 8일 치러지는 제 7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에 서둘러 기공식을 했다.

그해 고속도로 건설 예산은 한해 총 투자액의 1%에 지나지 않은 고작 2천만 원만 확보된 상태였다.

640m 밖에 공사할 수 없는 액수였다.

노선도 우왕좌왕이었다.

당초에는 종로구 사직동을 출발해 김포공항 인근을 거쳐 인천 송림로터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설계되었다.
후에 이 노선은 서울 양천동 부터 한창 건설 중인 인천항 제 2도크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 방향으로는 가좌동에서 도화동 선인학원을 지나 인천공설운동장 앞길과 연결해 부두 쪽으로 닿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선인학원 백선엽?인엽 형제의 입김으로 용현동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변경된 코스는 염전 지대를 많이 통과하기 때문에 지반 침하가 심해서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경인고속도로 건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날씨도, 기술도 아니었다.

재원(財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50달러였다.

우리 돈으로는 결코 개통시킬 수 없었다.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관료들은 외국에 나가 손을 벌였지만 쉽지 않은 문제였다.

재원 확보를 위해 채권을 발행했고 휘발유 값을 200% 인상하기도 했다.

개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철야 작업은 물론 세계 건설사에서 듣도보도 못한 '공법'을 활용했다.

길이 얼지 않도록 비닐을 덮어 씌어가며 아스팔트 공사를 했고 포장공사 장비가 부족해 인근 마을의 황소까지 동원해 로울러를 굴려가며 도로를 다지기 까지 했다.

육사 출신 공병 장교들은 현장 감독으로 차출되었다. 그들은 영어 원서를 펼쳐들고 일일이 체크해가며 현장을 관리 감독했다.

1968년 12월21일 역사적인 경인고속도로 개통식이 서울 쪽 출발지인 양평동 안양천변에 있는 당중국민학교에서 열렸다.

1967년 3월 24일 착공해 1년 9개월 걸렸지만 본격적인 공사일로 보면 8개월 만에 만든 고속도로였다.

인천과 서울 사이 29.463㎞를 18분 만에 주파하는,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빠르게 달리는 도로를 만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도로혁명 없이 산업혁명 없다"라는 취임사와 함께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

그리곤 바로 '최대속도 100㎞' 규정 표지판을 뒤로하고 가좌동 까지 시속 120㎞ '고속'으로 시주(始走)하면서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시대를 열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