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 (3)지명에 담긴 인천 정체성-미추홀에서 인천까지
인천의 이름은 비류의 미추홀(彌鄒忽)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매소홀(買召忽), 소성현(邵城縣), 경원군(慶源郡), 인주(仁州), 그리고 조선 태종 13년(1413) 10월15일에 이르러 인천군으로 불려졌다. 지명은 지역의 여건이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당시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지역의 정체성이자 역사라 할 것이다.


▲바다를 품은 바탕 고을, 미추홀 2030년
<삼국사기>백제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형제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온조는 한강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비류는 미추홀로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하였다.
미추홀(彌鄒忽)은 백제 초기 인천의 명칭으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미추홀국, 미추국, 비류국 등으로 일컬어졌다.


▲ 문학산성.
▲문학산성
미추홀이 순우리말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추홀과 매소홀은 같은 뜻을 가진 토박이말로 추측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매'는 '물(水)'로, '홀'은 '고을(城國)'로 해석하여 '수성(水城)'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매'를 '거칠다(野)'는 뜻으로 봐서 '거친 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미추홀을 한자의 훈을 따서 붙인 이두식 표현으로 보아 '밑골' 또는 '바탕골'로 해석하여 비류백제의 수도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비류의 미추홀 정착으로 출발한 인천은 고구려의 남하정책 이후 '매소홀'로 그 명칭이 바뀌어, 신라가 668년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계속 매소홀로 불리어 오다가 경덕왕 16년(757)에 '소성현'으로 개칭되었다. 소성의 소(邵)는 '고을 이름' 혹은 '높다', '거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문학산성을 상징했거나 도읍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대어향(御鄕), 경사의 원천
소성현으로 불리던 인천이 고려 숙종대(1095~1105) 경원군으로 승격·개칭되었는데 그것은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태후이씨(仁睿太后李氏)의 내향이었기 때문이다.
인예태후는 인주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증손자인 이자연(李資淵)의 맏딸로서 문종의 왕비가 되었는데, 문종과의 사이에서 10왕자와 4공주를 낳았다. 그 중에는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義天)도 있었고, 후에 순종·선종·숙종 등 3명은 왕이 되었다. 숙종은 어머니의 고향이 경사의 근원이라고 하여 경사 '경(慶)'과, 근원 '원(源)'을 써서 경원군으로 승격·개칭하였다.



▲ 원인재.
▲원인재
인종대(1122~1146)에 인천은 군에서 주(州)로 승격되면서 명칭을 '인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기도 했던 이자겸은 인종을 폐하고 왕이 되고자 1126년에 반란(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는데, 그 난이 실패함으로써 인주이씨는 몰락하고 말았다.
인천은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승격되었는데, 그 이유는 인천이 칠대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조상을 현양하는 의미에서 고을의 규모를 부(府)로 승격시켜 쇠락해 가는 고려 왕실을 높이려는 상징적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인천 정명(定名) 600년
조선이 건국되자 인천은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고, 지금의 '인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태종 13년(1413) 10월15일의 일이었다.
태종은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지역의 인구나 생산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격에 맞게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주자 대신 '산(山)' 자나 '천(川)' 자로 고치게 했다.
이에 따라 인주는 '인천군'으로 개칭되어 비로소 인천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태종대 지방제도의 정비는 인천만의 경우는 아니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렇게 개정된 곳이 모두 59곳으로 나타나는데, 인천처럼 '川' 字로 바뀐 곳이 36곳, '山' 字로 바뀐 곳이 23곳이었다.
특히,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의 경우는 5곳이 개편되는데 모두 '川' 字로 바뀌었다. 지금의 과천(과주), 포천(포주), 연천(연주), 시흥(금주) 그리고 인천(인주)이었다.
'인천' 지명 탄생으로부터 600년이 지난 지금, 당시와 비교해 본다면 '인천광역시'의 발전은 다른 도시에 비해 괄목(刮目)할 만한 것이라 할 것이다.


▲지명, 또 다른 역사
현재 인천광역시에는 10개의 군구가 있고, 그 지명들에도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다.
갑비고차라 불렸던 강화는 고려 태조 때(940) 와서 '강화현'으로 개칭되어 지명 탄생은 1000년이 넘었다. 부평의 경우도 고구려 때 주부토군, 신라 경덕왕때 장제군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수주(940), 안남도호부(1150), 계양도호부(1215), 길주목(1308)으로, 그리고 1310년(충선왕 2) 부평부로 개칭되었으니 기산하면 700년이 된다.
계양 역시 고려 고종 2년인 1215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2015년이면 800년이 된다.
중요한 것은 각 군구의 지명이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졌음에도 지금은 '인천광역시' 역사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행정의 변화가 아니라 그동안 신산(辛酸)의 고통을 이겨내며 성장·발전해 온 개척지 인천의 또 다른 내일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