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2.'청춘의 부고장' 받은 젊은이들
미비한 전산 시스템 … 소재불명 절반 영장전달 안돼

해외체류자 귀국종용·직장방문 등 이탈자 수색작업



입대(入隊)는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이 거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들도 여전히 징집영장을 청춘의 부고장처럼 느끼는 게 사실이다.

최근 윤 일병 구타 사망사건 등 병영 내 인권유린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어 젊은이들의 입대 기피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1948년 대한민국 창군(創軍) 이래 병역 기피를 비롯한 병무 부정사건은 사회 부조리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특히 1970년대 말까지 입영기피, 응소기피, 징병검사 미검 등 적지 않은 병역기피는 사회적으로, 특히 안보상 큰 문제를 야기했다.

1969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고의든 타의든 병역 기피자는 45만명에 육박했다.

당시에는 병무행정이 전산화 돼있지 않아 기피자의 절반 정도는 '소재불명(所在不明)'이었다.

산업화 시대가 되면서 직장을 얻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이 많아 영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부는 병역 기피자와 근무 이탈자(당시 신문 표기는 도망병)의 '색출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미 채용된 사람들은 해고 조치하도록 했고 이를 위반하는 업주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빨리 귀국하도록 종용했고 그들의 호주와 보증인에게 경고장을 발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병사계 경찰관, 수사과 요원, 병무청 직원들이 일일이 직장을 방문해 기피자와 이탈자를 색출했다.

특히 미군부대 종업원 중 기피자가 많은 것으로 보고 미군부대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사진은 1971년도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 소집된 인천지역 입영 장정들의 모습이다. 언제보아도 가슴 먹먹한 장면이다.

줄을 서는 순간 그들의 호칭은 '장정(壯丁)'으로 바뀐다.

장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앞날을 축복하고 송별하기 위해 간단하게 장행회(壯行會)가 열리지만 장정들의 머리는 벌써 논산훈련소에 가있다.

맨 앞에 섰다가 얼떨결에 입대 축하 꽃다발을 목에 건 대표 장정들은 이미 군기가 바짝 들었다.

지금은 개별적으로 훈련소를 입소하지만 1985년까지는 단체인솔 입영제를 시행했다.

한군데 모여 입영열차를 함께 타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인천에서는 주로 인천공설운동장에 모였다.

인근 부천, 김포, 시흥 지역 등의 장정까지 포함해 보통 1500명 가량이 소집되었다.

그날 운동장 주변의 풍경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환송 나온 가족과 친구들, 목도장을 파는 사람, 군번줄 파는 사람, 세면도구 주머니 파는 사람, 각종 먹을 것을 파는 행상 등이 한데 뒤엉켰다.

완장을 찬 호송관이 인원 점검을 끝내면 줄을 맞춰 운동장을 빠져 나와 숭의로터리를 거쳐 남부역(수인역 부근)으로 행진했다.

간혹 지역의 고등학교 밴드부가 군가와 행진곡을 연주하며 앞장서기도 했다.

그 음악은 장정들에게는 마치 장송곡처럼 들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지 일부 행인들은 손을 흔들며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남부역 철길에는 이미 논산행 입영열차가 길게 서있다.

객차 입구마다 검은 화이버를 쓴 헌병들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뻗치기를 하고 있다.

이제 부모, 친구, 애인과 헤어져야 할 시간. 환송하는 사람들이나 떠나는 장정들이나 얼굴에는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다.

"승차!" 호송 헌병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장정들은 열차에 오른다.

털컹.

입영열차는 몸부림을 한번 크게 친 후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열차는 지금은 사라진 주인선(朱仁線)을 달리며 가족들과 이별한다.

잠시 후 제물포역 부근에서 경인선 철길 옆을 따라 가다가 주안역 못 미쳐서 경인선과 합류한다.

그리곤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3년간의 군복무 첫날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입영열차를 타는 단체입영제는 86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폐지되었다.

그때 두발도 '빡빡'에서 스포츠형으로 변했다.

대규모 국제경기 개최를 앞두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취지였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