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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달동네의 '희망 두레박질'…고단한 삶 흔적이…
도심 달동네의 '희망 두레박질'…고단한 삶 흔적이…
  • 유동현
  • 승인 2014.06.24 20:25
  • 수정 2014.06.24 2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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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십정동-염전벽해 꿈은 계속된다

▲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촬영지 십정동 골목길 모습.
60·70년대 철거민 모여 열우물 형성해

비만오면 바다 … 장화없이 못살던 동네

나환자들 십정농장서 양돈·양계업 종사

사회사업가 한하운 '나병 恨' 시로 승화

그곳은 게토(ghetto)다.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되었던 게토처럼 그곳은 도시의 유민들을 가둬놓고 있다. 인근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날품을 파는 도시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산동네 달동네가 되었다. 그들은 한시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저버린 적은 없다. 오늘도 열우물에 모여 희망의 두레박질을 계속한다. 십정동에는 한때 한센병자들이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며 고단한 삶을 영위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유난히 계단이 많다. 마치 빗질을 한 것처럼 모두 아래를 향해 있다. 시간이 가면서 시멘트 계단은 쪼개지고 부수어지며 울퉁불퉁한 흉물이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이 동네에 젊은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우물길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붓을 들고 계단과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천 벽화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붓만 든 것이 아니다. 2002년도에 시작된 이 일에는 교육과 문화도 뒤따랐다. 그들은 맞벌이나 결손 상태로 자칫 방치되기 쉬운 아이들의 형과 누나가 되어 주고 산동네 마을의 공동체문화를 다시금 되살렸다.

언뜻 보아도 한때 이 동네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 같은 장소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길은 산동네에서 아랫동네로 통하는 길이다. 길 양쪽으로 허름한 2층 상가가 뻗어있다. 대부분 문이 닫혀있지만 비디오 가게, 양장점 등이 여전히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다. 고추를 빻기 위해 할머니 두 분이 방앗간 앞 평상에 앉아 있다. "할머니, 여기가 예전에 시장이었나 봐요. 시장 이름이 뭐예요."

"여기가 구시장이여. 옛날엔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곳이야. 약국도 있었고 정육점, 술집도 있었지."

▲ 좁은 골목길 따라 이어진 계단을 한 할머니가 오르고 있다.
인근 수출 5,6공단 덕분에 동네 경기가 좋았던 시절 상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제는 조금 떨어진 신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고 퇴락한 시장이 되었다. 요즘 보기 드문 장의사집 간판이 보였다. 동네마다 장의사 집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태어나고 죽는 곳이 집이 아니라 병원이다. 어렸을 적엔 장의사집 앞을 제대로 지나가질 못했다. 무서웠다. 그 집 안에다 주검을 모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장의사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초상집 대문에 내거는 등불과 병풍, 천막 등 장례식에 필요한 비품들이 보였다.

"이제 이 동네는 초상도 나지 않아. 늙어 죽을 사람들 웬만한 이들은 이미 다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어. 그나마 요즘은 죽으면 병원 영안실로 다 가잖아. 여긴 그냥 간판만 걸어 둔거요."

이 장의사집의 실제 주인도 현재 시내 모 병원 영안실 운영을 하고 있단다. 옆집에 사는 김금옥 (86) 할머니가 대신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이 할머니는 이 장의사집에서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초상 치렀다.

요즘은 십정동보다 '열우물'이란 이름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열우물은 인천에서 부평에 이르는 첫 마을이었다. 예전 인천 시내에서 부평을 거쳐 김포나 강화 길로 접어들려면 이곳을 거쳐야 했다. 배 밭과 염전이 있던 한적한 이 마을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다. 동구 만석동과 주안 지역 그리고 멀리 서울에서 철거민들이 떼밀려 들어왔다.

아랫동네부터 무허가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앞집의 어깨를 짚고 다른 집이 올라섰다. 집들을 나누는 담장은 없다. 담을 칠 공간조차 없었다. 집의 벽이 곧 담장이 되었다. 산 모양을 따라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오를 수 있는 곳 까지 집들이 들어섰다. 그렇게 산동네가 되었다.

동네에는 길도 따로 없었다. 다니다 보니 그게 골목이 되었고 길이 되었다. 갯골이 가깝게 있던 아랫동네는 비만 오면 바다가 되었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되었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인근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날품을 파는 도시 빈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달동네가 되었다. 몇 년 전 십정동은 수많은 집들을 긁어내고 한쪽에 거대한 아파트를 세웠다. 그 아파트들은 마치 겁먹고 움츠린 꼬마를 무릎 꿇게 하고 윽박지르는 '어깨'의 모습이다. 본격적인 재개발 바람으로 이 동네는 곧 덩치 큰 어깨들만 꽉 차게 들어설 것이다.

열우물에는 또 다른 눈물이 배어있다.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한센병을 앓던 사람들이 십정동 한켠에서 세상의 천대 속에 모진 삶을 이어갔다. 동암역과 백운역 사이 경인철도 변에 있는 신동아아파트 부지는 당시 나환자들이 개간해서 일군 십정농장 터였다. 1998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장은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철도 건너편에는 영세 공장으로 변한 그 잔재가 남아있다.

▲ 소규모 공장으로 변한 십정농장 양계장.
부평지역에 한센병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 '성계원'이란 집단 나환자촌이 형성되면서부터다. 성계원은 지금의 인천가족공원(부평공동묘지) 위쪽 산속에 자리 잡은 일종의 국립요양원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1947년에 '동인요양소'라는 작은 단체가 있었다. 서울, 수원, 강원도 등에서 한센병자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1961년에 성계원은 양성과 음성을 구분해 양성환자는 그곳에 그대로 남게 하고 음성(치유)환자는 자립을 위해 십정동과 청천동 등지로 이주시켰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십정농장으로, 개신교 신자는 청천농장으로 분리되었다. 그들은 사회에 냉대 속에서도 부지런히 양돈과 양계 사업에 종사하며 사회에 완전히 정착했다. 한때 인천 대부분의 달걀은 그들 손에서 공급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운영은 잘되었다.

그들 속에 한하운(韓何雲)이란 인물이 있었다. '문둥병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시 '파랑새' '보리피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하운은 나병의 한(恨)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사회와 소통하려 했던 예술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 그는 한센병자의 자식들을 위해 1952년 농장 인근에 신명보육원을 창설했다. 당시 보사부는 성계원에 거주하는 나환자들이 아기 갖는 것을 금지했고 아이가 있으면 부모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 수용했다. 성계원과 신명보육원 사이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이가 보고 싶은 부모와 부모가 그리운 아이들이 해가 지면 산을 돌아 넘어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몰래 만났다고 한다. 인근에 한 초등학교가 개교한 1965년대 무렵, 이 학교 학부모와 교직원들은 근처십정농장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을 꺼려 농장 근처에 그들만의 분교를 따로 두자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그 뜻을 관철시키진 못했다. 어렵사리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한센병자의 자식들은 교사와 반 아이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최근 인천시에서 발행한 '인물로 보는 인천사'에 한하운이 포함되었다. 그 책에 의하면 그는 1949년 12월30일 밤, 70여명의 환자를 이끌고 부평공동묘지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들과 닭똥 치며 동고동락 하다가 1975년 2월28일 십정동 산 39번지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 그는 죽어서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우는 파랑새가 되었으리라.

▲ '열우물길 프로젝트' 로 계단과 벽에 그려진 그림들. 
십정동은 1970년대 초 까지 만해도 거대한 소금밭을 품고 있었다. 바닷물이 동네 어귀까지 드나들었다.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에 소금을 공급하기 위해 조정에서 1정보(약 3000평) 규모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지를 조성했다. 현재의 홈플러스 간석점 부근인 십정1동 558-7 일원이다. 시험을 마친 이후 약 30여 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염전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고 주변에 천일염을 정제하는 소금공장들도 함께 들어섰다. 인천은 한 때 전국 소금 소비량의 절반을 충당할 정도로 풍부한 생산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염전 일대는 1969년 수출 5·6공단과 인천기계공단으로 지정되었고 결국 그 자리를 불도저로 밀어부침으로써 소금끼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염전벽해(鹽田碧海)의 흔적은 표지석 하나로 달랑 남아있다. 지번 하나 갖고 천일염전최초 시험지 표지석을 찾기 위해 주변을 서 너번 돌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공장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표지석은 옛 서울제강 단지 내에 있는 고물 집하장 정문 옆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옹색하게 있었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인천혜광학교
▲인천혜광학교
1956년 12월 임경삼 씨가 실명 어린이 6명을 양육하면서 세운 시각장애인학교이다. 58년 기독맹아원을 설립했고 61년 경기맹학교를 개교했다.
1982년 지금의 학교명으로 변경했고 현재 유치원과 초·중·고등부 및 전공부를 갖춘 시각장애인들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하모니카 연주가 전제덕 씨도 이곳 출신이다.

▲ 인천축산물 도매시장
▲ 인천축산물 도매시장
흔히 '십정동 도살장'으로 불렀던 곳으로 1983년 개설했다. 지난 2001년 이곳에서 죽은 소를 불법도축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도축공정을 개선하고 안전하고 위생적인 축산물을 공급해 신뢰를 얻었다. 시장 안쪽의 인천도축장(삼성식품)에서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에 소 80두, 돼지 600~700두가 도축된다고 한다. 인천축산물백화점을 비롯해 골목골목 형성된 상회 등 현재 130곳의 고기 판매점이 도소매업을 하고 있다.

▲ 천일시험염전 터
▲ 천일시험염전 터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 조정에서 현재의 홈플러스 간석점 부근에 1정보(약 3000평) 규모의 천일염 생산 시험지를 조성했다. 이 시험지에서 시작된 천일염 생산은 이후 일본인 니카오쿠 오오쿠라가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천일염 제조기술을 도입하고 주변지역에 염전 축조가 이뤄지면서 대량 생산이 본격화됐다. 1911년에는 부평구 십정동, 서구 가좌동 일대 99정보가 거대한 천일염전으로 변모했다. 이 자리에는 수출 5·6공단(현 부평·주안산업단지)이 들어섰다.

▲ 인천일보, INCHEON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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