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오래된 미래, 인천 골목
(20)용현동 - 용현벌 미나리밭에 심어진하와이 사탕수수
▲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1954년 용현벌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 동상·수준원점 교내 보관중

원점축제 등 매년 돌림자행사 개최

옛 미군유류보급창 터 아파트 신축

골목내 '이윤생·강씨정려' 기념물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용현벌에 대학이 들어설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인하대 뒷쪽에는 독쟁이 고개가 있다. 이는 독정리에서 파생한 명칭이다. '독정(讀亭)'은 책을 읽는 정자라는 뜻이다.

미나리밭과 피난민수용소로 사용했던 너른 터에 상아탑이 우뚝 서게 된 운명은 이미 땅 이름에서 타고 난 듯하다.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이민자의 한 많은 눈물과 땀이 토대가 된 배움터이다.


▲ 담벼락 한쪽에 널려 있는 신문.
1979 년 2월24일 비 내리는 오후, 인하대 인경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사이에 프란체스카 여사,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이재원 인하대 총장 등의 모습도 보였다. 잠시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동상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4·19혁명 후 각지에 있던 그의 동상이 철거된 후 처음으로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그가 1965년 세상을 떠난 후 첫 번째로 세워지는 동상이었다. 하와이 한인동지회에서 보낸 성금 5만달러를 들여 6m30㎝ (좌대 3m 포함) 높이로 세워졌다. 화강암 석대의 추념문에는 '하와이 이민의 한 많은 눈물을 받아 본교 창립에 크게 이바지한 초대 대통령'이라고 쓰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와 같은 최고 수준의 대학을 우리나라에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다수 하와이 교포들의 '고향'이기도 하고 공업단지가 들어서는 등 공대 설립의 장점을 많이 지닌 인천을 점찍었다. 인천시는 용현벌 부지 41만3223㎡를 무상 제공했다. 당시 그곳은 온통 미나리밭과 배추밭이었고 6·25 전쟁 이후에는 잠시 피난민수용소로 사용됐던 곳이었다.

지난 1954년 그 벌판에 '인하공과대학'이란 상아탑이 세워졌다. '인하'라는 이름도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 앞 글자에서 따왔다. 대학 설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하야할 때까지 매년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할 정도로 인하대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동상은 학원 민주화 바람을 비켜가지 못했다. 1983년 10월 학생들에 의해 동상은 밧줄에 묶여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현재 동상은 학교 측에서 원형대로 복원해 보관하고 있다.

인하대생들은 앞문을 나두고 주로 뒷문으로 다닌다. 정문 쪽은 공장지대이기 때문에 상권이 발달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뒷문 건너편이 대학가가 되었다. 1970~1980년대 인하대 후문의 명소는 당구장이었다. '당구학점 300은 돼야 졸업 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하대생의 평균 당구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영진당구장, 거북당구장 등 당구장이 책방보다 많았다. 그 덕분에 이 동네에서 유명한 여자 당구선수가 배출됐다.

2004년과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가영 선수다.

아버지 김용기 씨는 이곳에서 당구장을 운영했다. 김가영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연스럽게 큐대를 잡았다.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는 큐대를 딸의 키에 맞춰 잘라 주었고, 김가영은 대학생 오빠들 틈에서 당구공과 씨름했다. 15년 후 그녀는 포켓볼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 지난 1963년 인하공전으로 옮겨진 한국 지형 높이의 기준점 '수준원점(水準原點)'
인하공전 7호관 뒤에는 중요한 국가시설이자 문화재가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첨성대처럼 보이는 붉은 벽돌의 원통형 건축물은 '수준원점(水準原點)'이다.

이 수준원점은 대한민국 지형 높이의 기준점이 된다. 즉 백두산의 높이 해발 2744m는 이곳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바다로부터의 높이를 말하는 해발(海拔)의 기준점이 바로 이 수준원점이다. 원래는 당시 바닷가였던 중구 항동1가 2에 설치했다. 바다매립이 계속되자 이 수준원점을 더 이상 바다 옆에 두기 어렵게 되었고 육지 안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전 대상지로 떠오른 곳이 인하공전 캠퍼스였다. 지반이 평탄하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수준원점은 지난 1963년 12월 항동 바닷가에서 인하공전으로 옮겨졌다.

비록 국립지리원의 관리 대상물이지만 학생들은 국내 유일의 수준원점이 학교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인하공전은 학교에서 송도유원지까지 왕복하는 원점마라톤대회는 물론 원점체육대회, 원점축제 등 '원점' 돌림자의 행사를 매년 치른다.

인하대와 같은 울타리에 있는 정석항공고 뒷문 건너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이 있다. 이 보육원은 우리나라 개화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다. 프랑스 뮈텔 주교가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는 "1년 전에 인천에 도착한 마리클레망스 수녀와 엠마누엘 수녀가 가을에 4살과 12살 여자 아이 등 5명의 아이들을 성바오로 수녀회 인천본원 시료소에서 돌보았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1894년부터 고아들을 돌보아온 해성보육원의 첫 출발이자 국내 근대 보육사업의 첫 해로 꼽을 수 있는 명확한 증거다.

프랑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1894년 가을 길거리에 버려진 4살과 12살 된 여자아이와 이듬해 4월 2살 된 남자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답동성당 내에 해성보육원을 설립했다. 광복 이후 고아의 수가 급격히 늘자 보육원은 1948년 현재의 자리에 용현동 분원을 설치했다. 6·25 전쟁 때 신부와 수녀들은 200여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송도와 덕적도 등으로 피란을 다녀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보육원을 재정비하고 1975년에 아예 보육원 자체를 용현동 분원으로 이전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인하대 옆에는 얼마 전 까지 큰 공터가 있었다. 흔히 'SK저유소'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군수공장 히다치가 있었고 광복 후에는 POL(Petroleum Oil Lubricants)이라 불린 미군유류보급창이 있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름을 인천항을 통해 들여왔고 이곳에서 각 지역으로 송유관 혹은 트럭으로 유류를 수송하는 일종의 물류 기능을 하는 미군부대였다.

정전 협정을 앞둔 1953년 6월13일 밤 10시 북괴 폭격기 3대가 인천 상공에 나타나 이 유류보급창을 기습 공격했고 이어 인근 신흥동 소재 송도직물공장에 폭탄 몇 발을 투하했다. 공장에서 잠자던 여공 수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유류창 부대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부대의 화재는 거의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고 결국 불도저로 모래를 덮어 진화했다고 한다. 빈 드럼통들은 숭의동 공설운동장으로 운반되었다. 그 드럼통을 펴서 처음으로 운동장 담장을 쳤다.

부대의 규모와 시설은 땅 크기만큼이나 엄청났다. 인천 POL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가 959명에 달했다. 1966년 4월16일 도서실, 의무실, 각종 오락실을 갖춘 현대식 3층짜리 POL노동회관을 낙성했는데 그 오픈식에 당시 인천 시장이 참석했다.

1972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자리에 석유공사가 들어섰고 이어 유공, 선경 그리고 SK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활한 나대지 한 귀퉁이에는 한때 부천유공축구단과 SK와이번스야구단의 연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곳은 현재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SK건설이 '인천SK스카이뷰'라는 브랜드로 22~40층 짜리 총 26개동 3971가구의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다.



▲ 용현동 골목 깊숙이 위치해 있는 시도기념물 제4호 '이윤생·강씨장려(李允 生姜氏旌閭)'
용현동 골목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는 유리(유류)부대 뒤편에 시도기념물 제 4호인 이윤생·강씨정려(李允生姜氏旌閭)가 있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세운 건축물이다.

1604년 용현동에서 태어난 이윤생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인근의 낙섬으로 들어가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면서 청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다시 청나라 대군이 침입하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의병들과 함께 34세 나이에 전사했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도 곧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후에 철종은 정려를 내리고 그를 좌승지에 강씨를 숙부인으로 봉했다.

3년 전 용현동 일대에서 영화 한편이 촬영됐다. 인생 끝에 찾아온 아름다운 사랑을 깊은 시선으로 담아 낸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는 용현동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담당자는 용현동 일대를 둘러보고 로케이션 장소로 바로 OK했다. 김만석(이순재)의 손녀 연아(송지효)의 직장인 용현3동 주민센터를 비롯해 비룡쉼터, 용현시장 등이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6·25 전쟁 후 독쟁이 골목과 수봉산 기슭에는 이북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과 시내에서 쫓겨온 철거민들이 몰려들었다. 인천에서 제일 먼저 시내버스 노선이 개설된 곳일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했다. 그들은 영화 속의 노인들처럼 지나온 시간에 순응하며 동네와 함께 그렇게 늙어 갔다. 비탈진 골목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들의 주름처럼 깊게 패여 갔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낙섬 지도
▲낙섬

경인고속도로가 끝나는 현대아파트와 한양아파트 부근에 낙섬이 있었다. 옛 지도(사진)에는 원도(猿島)라고 표기를 하고 납도(納島)라고 병기를 하고 있다. 옆에는 소원도(小猿島)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 이곳에서 서해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낙섬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면서 둑으로 연결됐다. 염전에 바닷물을 대주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별다른 놀이시설이 없던 당시 이곳은 망둥어 낚시터였고 물놀이 장소였다. 어린아이들이 익사사고를 많이 당하기도 했다. 현재 용현동에서 숭의동으로 넘어가는 큰길이 '낙섬사거리'로 불리고 있다.


▲ 맹아산
▲맹아산

용현초교 건너편에 있는 작은 산으로 그곳에 1960년대에 현재 부평에 있는 인천성동학교 전신인 농아학교가 있었다. 고아원도 이곳에 있었다. 1940년대 맹아산의 채석장 부근에는 인천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장좌리 약물터'가 있었다. 용현초교 교가에는 '약수터 넓은 뜰에…'라는 가사가 있다. 현재 맹아산 일부에 우성아파트가 들어섰다.


▲ 황해중학교
▲황해중학교

6·25 전쟁 이후 인천으로 피난 온 황해도민들이 용현초교 근처에 세웠던 학교. 성공회 사제 전세창 신부를 따라 남한으로 내려온 황해도 피난민들이 1952년 자녀 교육을 위해 현재의 인천성공회(성공회 병원) 구내에 학교를 세웠다. 지난 1955년 성당을 신축할 때 용현동으로 학교를 이전했다. 1969년 경인고속도로가 학교 부지를 통과하면서 폐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전쟁 전 황해도 연백에 황해중학교가 이미 있었다. 이 황해중학교와 인천 황해도 피난민들이 세운 황해중학교가 같은 학교인지는 알 수 없다.


▲토지금고

지난 1975년 4월 업무용 토지, 주택건설용 대지 등 토지 이용도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토지금고법'에 의거해 토지금고가 발족되었다. 이는 현 LH의 전신이다. 토지금고는 현 용현5동 일대에 있던 염전 및 갯벌을 매립하여 시범주택단지로 조성했다. 이에 이 지역을 토지개발기관의 명칭을 따서 흔히 '토지금고'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