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성복순은 평안북도 동림군 장봉리에 있는 친정 집에서 노모 엄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탁아소에서 찾아온 아들 김영인(金永仁)이를 노모 엄씨한테 맡겨놓고 부엌으로 나갔다.

 노모 엄씨가 저녁나절 방에다 군불을 넣는다고 불을 땐 부엌인데도 부뚜막의 플라스틱 함지박 물은 그새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큰솥에다 길러놓은 찬물을 한 양동이 붓고는 큰솥 아궁이에다 불을 지피기 위해 밖으로 땔감을 가지러 나갔다.

 온 세상이 눈 이불을 덮어쓰고 고이 잠든 밤 같았다. 말갛게 얼어붙은 밤하늘에서 은비늘 같은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눈은 그만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지난 가을에 베어다 말려놓은 옥수수대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아궁이에 쑤셔 넣고 잠시 불을 때었다. 그러다 보니 솥가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려오며 푸릉푸릉 김이 치솟았다. 그녀는 펄펄 끓는 물을 두어 바가지 퍼내 함지박에 쏟았다. 손이 쩍쩍 달라붙을 만큼 얼어붙어 있던 함지박이 녹으면서 부엌에 온기를 돌게 했다. 그녀는 며칠 전에 돌과 미(米)를 골라낸 입쌀을 큰 바가지에 쏟아 물로 씻어낸 뒤 손바닥으로 팍팍 소리가 나게 문질렀다. 잠시 입쌀을 문지르다 보니 하얀 쌀뜨물이 배어 나오며 누르께한 입쌀이 뽀얗게 보였다. 그녀는 다시 더운물을 한 바가지 퍼부어 뿌옇게 우러나오는 쌀뜨물을 받아낸 뒤 큰솥 옆에 걸려 있는 작은 솥에다 입쌀밥을 안쳤다. 그때 노모 엄씨가 부엌과 살림방 사이에 달린 쪽문을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얘야, 인영이 잠들었다. 내가 뭐를 도와 주면 좋으네?』

 『미리미리 조금씩 준비를 해놓아서 메밥과 탕만 끓이면 돼. 오마니는 기냥 계시라요.』

 엄씨는 딸의 재빠른 손놀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제 남편의 제수를 장만하는 딸의 모습이 정성스럽다 못해 지극정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엄씨는 바깥 영감의 제삿날 자신은 정말 딸처럼 저렇게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는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다 긴 한숨을 쉬었다. 구성시에 나가서 직장생활을 하며 사는 큰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자신은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딸자식 보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살림을 맡아 살 시기에는 당에서 옛날처럼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만류하던 시기라 조상님들의 제사마저 간단하게 차려놓고 고인을 추모하는 차원에서 제사를 끝내곤 했는데 요사이는 당에서 뭐라고 단속하지 않는지 딸의 모습은 옛날 자신이 살림을 맡아 살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적한 촌락에 나이 먹은 어미와 딸이 단출하게 사니까 누가 말을 퍼뜨릴 염려도 없었다. 또 볼 사람도 없어, 딸은 누구 눈치볼 필요 없이 제 마음껏 죽은 김서방의 제사를 준비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곁에서 보니까 지극정성이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