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도원동, 복숭아 꽃 향기에 실려 온 삶과 죽음

일제시대 전염병원·화장터 자리

공설운동장 단장 … 시민 경기관람

남한 최초 소주공장 '조일양조장'

표지석만 남긴채 흔적없이 철거





'모모'는 복숭아의 일본말이다.

모모산이 도원동을 품고 있다.

일제는 이곳을 복숭아 밭으로 만들고 1906년 이 동네를 도산리(桃山里) 라고 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풍신수길이 활동했던 때를 일컫는 '도산시대'에서 도산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이곳은 화장터와 전염병 격리 병원이 있어 생(生)과 사(死)가 혼재했던 곳이었다.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도원벌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도원동은 인천의 끝이었다.

산 밑으로 작은 개천이 흘렀다.

개천은 지금의 제2장로교회 앞을 휘돌아 독갑다리 밑으로 해서 바다로 흘러나갔다.

이 개천이 옛 인천의 지경(地境)이었다.

그 밖은 부천군 문학면과 다주면이었다.

외진 곳에는 흉하고 험한 시설이 들어서는 법. 옛 야구장 앞 소방서가 있던,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기슭에 화장장이 있었고 바로 밑 지금의 중앙여상 부근에는 콜레라나 장티푸스 등 전염병 격리병원인 덕생원이 있었다.

덕생원의 전신은 '피할 피'자를 쓰는 피(避)병원이었다.

일제는 1898년 당시 만해도 도시 외곽이었던 답동의 일본인 공동묘지 인근에 환자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과 의료장비, 의료진을 갖추고 피병원을 세웠다.

도시가 점차 확장되자 대표적인 기피 시설인 피병원은 외곽으로 밀려갔다.

1921년 모모산 기슭 일본군 병참사령부 수비대 터에 시설을 확충해 이전하고 이름을 덕생원이라 하였다.

대지 2719평, 건평 404평 규모에 26개실의 병실을 두고 최대 96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광복 후에도 이 병원은 인천의 전염병 관리를 담당했으나 6.25 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그 기능을 상실했다.

1955년 주안동 산 5번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미군의 원조로 새로운 건물을 착공해 1956년 10월 12일 제인원(濟仁院)이라는 새 이름으로 개원했다.

후에 제인원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남구보건소가 들어섰다.

보건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그곳에 빌라가 들어섰다.

1954년 고 김응순 목사는 도원동 덕생원 자리에 어려운 청소년을 위한 성경구락부를 세운다.

이것은 보합고등공민학교로 되었다가 후에 현재의 인천중앙여상으로 발전한다.

전염병원, 화장터 등으로 인해 한낮에도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아 피해가고 싶은 지역이었던 이곳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 것은 1934년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운동장은 1953년 인천에 주둔한 미군 항만사령부로부터 기름 드럼통과 목재 등의 자재를 원조 받아 새로 단장했다.

이 공사에 동원된 트럭이 연 9백대에 이르렀다.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철판에 시커멓게 타마구(콜타르)를 바른 담장이 운동장을 빙 둘러 싸안았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모모산 기슭에 앉아 한가롭게 운동장에서 열리는 각종 경기를 공짜로 즐기곤 했다.

그동안 3차례의 전국체전과 한 차례의 소년체전을 개최했던 공설운동장은 이제 다 헐리고 그 자리에 축구전용경기장 숭의아레나가 건립되었다.

산 위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문득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섞여 낯익은 안내 방송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 했다. "운동장 최씨, 운동장 최씨, 본부석으로 와 주세요."

산 정상 부근에는 1976년에 실내체육관이 건립되었다.

몇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건립될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역도산'의 레슬링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촬영 전, 영화사 로케이션팀이 전국을 다 뒤졌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4,50년대 일본 체육관의 분위기가 나는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도원체육관을 보고나서 뛸 듯이 기뻤다.

레디 액션. 역도산 역을 한 설경구가 마루 중앙에 설치된 링 위에서 당수 한방으로 거구를 쓰러트렸다.

산을 넘어 선화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뉴월드그린 아파트가 나온다. 얼마 전 까지 그 앞에 오래된 건물 하나가 있었다.

남한 최초의 소주공장 조일양조장이다.

평양에 세워진 '조선소주' 보다 넉 달 늦은 1919년 10월 12일 설립됐다.

일본인이 세운 이 회사의 상표는 '금강표'였다.

조일양조는 1925년 기계를 증설해 대량 생산에 나섰고 시음행사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까지 도입해 판매량을 늘렸다.

1928년 전국 소주양조업자연합회 회장사(社)를 맡을 정도로 조선에서 알아주는 회사로 성장했다.

조일양조의 소주는 만주, 사할린 등 까지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지역의 술 산업을 위해 인천부(현 인천시)도 발 벗고 나선 듯하다.

인천부사(府史)에 의하면 1927년 인천부청 내에 '주류시험실'을 설치해 주질(酒質)을 개량하고 우등주를 제조함으로써 일본 제품의 유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수출에도 이바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해 8월 3일 총독부를 출입하는 신문·통신사 기자단이 인천을 방문했다.

그들은 기차로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도착해 곧바로 조일양조장을 시찰할 만큼 당시 조일양조의 술 공장은 인천의 주요 산업시설 중의 하나였다.

조일양조는 사업이 잘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이라 할 수 있는 축구단도 창단했다.

'인천 조양'이라고 불린 조일양조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막강했다.

FA컵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초대 우승과 2회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광복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 소속이었다.

광복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세금 체납, 미군정의 양조 금지령 등으로 인해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6.25전쟁 직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비어있던 공장 터는 1978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위해 건설된 실내수영장 부지로 내주었다.

그 밑의 1949년에 신축된 조일양조장 별관 건물은 최근 까지 남아 있었다.

이마저도 2012년 7월 중구청이 주민들의 주차시설을 위해 표지석 하나 달랑 남기고 흔적도 없이 밀어버렸다.

50m 정도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모모산은 유동 쪽으로 경사가 급한 편이다.


옛 도원동사무소 옆에 설치 된 '70계단'은 가파른 산을 직코스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70개의 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율목동, 화수동 등 원도심의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옆에는 40계단도 있다.

이것은 모두 신사(神社)에 오르는 계단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산 정상에는 규모가 제법 큰 도원신사가 있었다.

지금은 산 정상에 광성중·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인천서장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가 1955년 구두닦이 등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인천소년수양원을 개설하면서 시작된 학교다.

1965년 광성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경인선 철길이 있는 큰길로 나가면 도심 속 대장간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거리에는 3, 40년 전만해도 철길 따라 철공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쇠 두드리는 소리를 좇아 도원철공소로 들어갔다.

나종호(64) 사장이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두드리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쇠고챙이 10여개를 신문지에 싸 들고 왔다.

"굴 따는 찍새예요. 굴 따다보면 구부리지거나 무뎌져요. 날 세우려고 갖고 왔어요."

대장장이는 시뻘건 화로에 찍새들을 올려놓는다.

달궈진 찍새는 쇠망치 세례를 받는다.

불꽃이 튄다.

정말 찍 소리 못하고 매를 맞지만 덕분에 찍새는 새로운 날을 세운다.

"40년 넘게 쇠를 두들겼죠. 예전에는 한집 건너 철공소가 있어서 닻, 대형 집게, 곡괭이, 낫, 호미 등 물론 특수 주문용 철기구도 이 동네에서 다 만들었어요."

이제는 철공소 대신 기성품을 파는 가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머지 않아 이 거리에는 '대장간의 합창'이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보각선원

1912년 인천의 유지 정치국의 대지를 기증받아 김적음 스님이 현 광성중고등학교 뒤쪽에 보각선원을 창건했다.

창건 당시 본당과 시왕당, 칠성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광복 이후 개축한 대웅전 건물만 남아있다.

이곳은 동명초교의 뿌리가 박힌 곳이다.

설립자 박창례 선생은 1930년 4월 보각선원 강당을 빌려 '관서학원(關西學院)'이란 야학 간판을 내걸었다.
성냥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하는 소년·소녀 직공 100여 명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죽산이 살던 집

도원동에는 간첩 혐의 등 억울한 누명으로 사법살인의 희생양이 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989∼1961)이 살던 주택이 있다.

죽산이 1948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입각하기 전까지 도원동 12번지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 소방서 바로 위 언덕에 있는 일본식 주택 골목이다.

이 골목에는 인천부(府)에서 지은 40여 평짜리 부영(府營)주택 48채가 있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시에서 대단위 택지를 조성해 지은 시영주택단지이다.

현재는 오래된 축대 위에 쌓은 대여섯 집의 부영주택 만이 남아 있다.


▲독갑다리

도원동 언덕에서 내려가면 숭의동 쪽으로 독갑다리가 있었다.

다리 너머 바다 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염전이 많았다.

그 염전을 오가던 다리가 독갑다리다.

이 다리는 1916년 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숭의공구상가거리 입구에 세워진 비문에 의하면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큰 독에 흙을 채워 그것으로 교각을 삼았다고 해 독갑다리 라고 불렀다는 설과 이 다리를 중심으로 옹기장이 있었는데 독 값을 받으러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 해서 '독값다리'라 했는데 이것이 '독갑'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선화동의 유곽이 폐쇄되면서 많은 윤락녀들이 이쪽으로 이동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중요한 손님 접대는 독갑다리 색시집에서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현재 독갑다리 일대는 크고 작은 철공소와 공구상들이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