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오래된 미래, 인천골목 16 신흥동
피고 지고 또 피고…그렇게 꽃처럼 흘러간다


동네 뜻 '광복 맞아 새롭게 부흥'

과거 국치 흔적 씻어내려는 의지


일제 때 수인역 인근 정미소 즐비

경기도 곡물 반출 위해 열차 연결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

6·25 희생장병 유해 모신 해광사

우리나라 최초 사이다 생산공장

신흥시장 일대 유곽 조성되기도

 

   
▲ 일제시대 곡물 반출에 이용되던 철길

한때 일본 동네였던 신흥동 골목을 걷다보면 국치(國恥)의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동네는 사람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이 지킨다. 그들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남아있는 거리와 가옥에서 불현듯 일본인의 탐심과 욕정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신흥동에 수인선의 종착역을 만들고 수탈의 철길을 깔았다. 그 길을 따라 조선인의 울분과 탄식이 실려 왔다.
 

   
▲ 신흥동 로터리 인근 왜색풍 이층집.

신흥동(新興洞)은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이전의 동네 이미지를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도 담겨져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광복 당시 곳곳에는 적산(敵産)가옥 등 왜색풍의 건물이 즐비했다.

대표적인 건물이 정미소 쌀 창고였다. 옛 도립병원(현 보건환경연구원)과 수인역 인근에는 가등(加藤)정미소, 역무(力武)정미소 등 크고 작은 정미소가 있었다. 1930년대 일제는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이곳에서 정미한 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의 기찻길을 창고 안까지 연결시켰다. 현재의 삼익아파트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는데 정미소에서 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 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 수인곡물거리.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창고들은 한동안 사동 삼거리부터 수인역까지 어깨를 겹치듯 줄지어 있었다. 고려정미소, 선경창고 등으로 불리다가 1970년대 들어서 하나둘씩 디스코텍과 카바레 등으로 '용도변경' 되었다. 인근에 민가도 없을 뿐 아니라 천장 높게 두꺼운 벽돌로 지어져 간단히 손을 보면 훌륭한 댄스홀이 되었다.

이제는 이마저도 거의 다 없어졌다. 대형마트, 가전양판점, 물류창고로 사용하는 서너 동의 창고만이 옛 흔적을 초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쪽의 고층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아파트에 둘러싸인 창고가 손바닥만하게 보였다.

한때 쌀가마니가 가득했을 빛바랜 물류창고 한군데를 들어가 보았다. 옛 모습 그대로 삼각 구조를 한 여러 개의 나무가 천장을 지지하고 있다.

"너무 낡아 가끔 떨어지기도 해서 몇 개는 새것으로 지지대를 만들었지만 벽은 아주 단단해서 사용에 별 문제없습니다."

창고 주인은 이 창고가 80년 정도의 풍상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창고 거리 부근에는 없어진 창고 한면을 담벼락 삼아 살고 있는 집들도 종종 눈에 띤다. 신흥동 창고거리는 붉은 벽돌에 말라 비틀어져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퇴락하고 있다.

창고 뒤편으로 가면 곳곳에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집들로 광복을 맞아 적산가옥으로 등재되었다. 적산(敵産)가옥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으로 일본인들이 남겨 놓고 간 집들이다.

"6·25전쟁 때 이 동네는 답동성당 때문에 살아남았지. 맥아더가 십자가 달린 큰 성당 부근 쪽으로는 함포 사격을 하지 말라고 했던 거지. 왜놈들이 자손만대로 살 작정을 했는지 집을 튼튼하게 지어서 크게 손질하지 않고도 살아왔는데 이젠 슬슬 그 끝이 보여."

몇 가구로 쪼개져 있던 나가야(長屋)식 일본집을 터서 구멍가게를 낸 주인장의 말이다. 이 가게에서 신흥동 로터리 방향으로 가면 역사책 사진에서나 보았을 것 같은 집 한 채가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먼지를 만만치 않게 뒤집어 쓴 왜식풍 이층집이다. 외벽을 둘러싼 널판지들은 원래 저렇게 시커멓지 않았으리라. 집에 대한 내력을 알고 싶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신 뒷집을 방문했다.

"우리집도 예전에 산파가 살았던 집으로 40년이 넘었는데 저 집은 처음 이사왔을 때 봤던 모습 거의 그대로예요. 족히 70~80년은 되지 않았을까."

저녁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그 집의 주인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 집에 아직도 다다미가 깔려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못내 아쉬웠다.

큰길을 건너 돌층계를 오르면 해광사란 절이 있다. 도심에서 만나기 드문 한적한 사찰이다. 원래 해광사는 1910년에 일본인이 지은 화엄사 절이었다. 그 흔적이 절 입구 돌기둥에 희미하게 새겨져있다. 1994년에 왜색풍의 절을 헐고 대웅전을 다시 지었다. 대웅전 뒷쪽과 옆쪽에는 오래된 벽돌집 두 채가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뒤쪽 건물 시왕전이다. 문을 열어젖히니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바깥 공기를 가른다. 이 건물은 슬픈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곳에는 6·25전쟁 전몰장병들의 유해 40~50기가 모셔져 있다. 얼마 전까지 지하에 있던 것을 1층으로 옮겼다.

"아마 6·25 전쟁 중에 전사한 경기도 출신 장병들을 이리 모신 것 같아요. 유해들은 하나같이 이름은 없고 그냥 김일병, 박이병… 그런 식으로 표시해서 찾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한동안 인천시 차원에서 위령제도 지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요. 다 잊혀진 거죠." 황진스님의 설명이다.

이곳에는 일본인 위패들도 있었다. 패전하면서 서둘러 가느라 미처 챙겨가지 못한 것들이다. 한일수교 후 후손들이 다 찾아갔고 현재는 1기만 남았다고 한다. 그 남은 1기의 후손은 정기적으로 재(齋)를 지내러 이곳에 온다고 한다. 한동안 일본왕의 위패도 있었는데 누군가 후미진 곳에 처박아 두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아직도 신흥동 한구석에는 일본인의 망령과 국군의 영령이 혼재돼 떠다니는 듯했다.

해광사 부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다 공장이 있었다. 인천부사에 의하면 '1905년 일본인이 창업한 인천탄산수제조소가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짜리 발동기를 사용해 사이다를 생산했다'고 전한다. 그 자리에는 현재 '동인당'이라는 옛 물건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있다.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사이다병 뚜껑 만드는 부업을 많이 했다. 후에 같은 동네에 '라무네 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이 생겼다. '라무네'는 물에 설탕과 포도당, 라임향 등을 첨가해 만든 달콤한 탄산음료로 일본인들이 즐겨 마셨다. 광복이 되자 인천탄산수제조소는 ㈜경인합동음료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타사이다'라는 이름의 사이다를 생산했고 이는 훗날 칠성사이다로 이어진다. 1960년대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씨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일명 '사이다송'을 불렀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둥둥 떠다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인 듯 하다.

1953년부터 상설시장이 된 신흥시장은 한때 인천에서도 잘 나가던 재래시장으로 손꼽혔다. 부두 길목에 위치해 있고 시장 앞에 시립병원이 있었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현재는 시장 골목도 수십 미터에 불과하고 점포들도 60여개의 불과 할 만큼 상권이 예전만 못하다.

 

   
▲ 부도유곽 입구.

이 시장 일대는 1903년 '화개동(花開洞)'이란 이름을 얻는다. 꽃이 피는 동네. 여자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였다. 공창(公娼)제도를 인정한 일제는 이곳을 유곽(遊廓) 지역으로 만들고 그들의 욕정을 배출했다. 당시 40군데 업소에 매춘부 130여명이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개동은 꽃 화(花)자는 그대로 품에 안은 채 1914년 선화동(仙花洞)으로 개명된다.

미 군정기에 유곽은 폐쇄된다. 1948년 2월 공창 폐지를 앞두고 경기도 보건후생국는 인천 유곽 22호에 있는 180명의 창부에 대해 차후의 희망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공장취업 40명, 화류계 종사 32명, 출가 12명, 자기 집 귀가 12명, 그리고 미정 23명으로 조사된다. 이중 성병에 감염된 화류병자 80명을 도립병원 인천화류병 치료소에 1개월간 강제로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한다. 이를 위해 입원비 38만9500원(식대 포함)와 교화비 22만4000원의 예산을 책정한다. 인천부는 공창폐지대책위원회를 열고 이들이 가정주부로 갱생할 수 있도록 단기 교화강습을 시키고 유곽은 전부 여관, 음식점, 카페, 당구장 등으로 전업시킬 방침을 세운다.

유곽은 폐쇄되었지만 한번 핀 꽃은 좀처럼 시들지 않았다. 1960년대 신흥동 일대는 젓가락 장단에 맞춰 술판을 벌이는 니나노집부터 방석집, 기생 요릿집, 창녀집에 이르는 거대한 환락가였다. 이후 이 홍등가는 대대적으로 정비되었고 '꽃'들은 인근 독갑다리, 학익동, 옐로우하우스 쪽으로 옮겨 다시 피게 된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1910년 9월 내동에 있던 감리서에서 화정 2정목(신흥동 2가)에 신청사 대지 680평 건평 104평 규모로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을 건립했다. 관할구역은 인천부, 부천군, 김포군, 강화군으로 확장했다. 1932년 재정 부담으로 폐청하고 등기소만 남겨 두었다. 1935년 옛 감리서 터에 신청사를 건축하고 이전했다. 그 자리에 항도실업학교가 있었고 현재는 중구노인복지관이 있다.

 

   
▲ 동본원사.

▲동본원사
1885년 9월에 동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인의 주택을 전전하다가 1888년에 관동 1가 1번지에 80평 규모의 임시본당을 만들었다. 1892년까지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으로도 활동했다. 1899년 10월 현재의 신흥동 로얄답동맨션에 건물을 세워 이전했다. 동본원사 외에 현재의 송도중학교 교내에 서본원사도 있었다.

 

   
▲ 인천부윤 관사.

▲인천부윤 관사
신흥동 1가 19번지에 인천부윤이 사용했던 관사가 있다. 이 주택은 전형적인 일본풍의 건물로 1966년에 새로 인천시장 관사(현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 신일반점 임서약 옹.

▲신일반점
현재 우리나라 중국음식점 중 가장 고령 현역 주방장은 신흥동 신일반점의 임서약(林書若) 옹이다. 1931년 생으로 올해 만으로 82세다. 중국 산둥(山東)성이 고향인 임 옹은 66년째 신흥동로터리 주변에서 청요리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신일반점의 뿌리는 현재의 자리 건너편에 있던 호떡집이었다. 호떡집을 중국집으로 바꾸고 '신흥동에서 제일 맛 좋은 음식점이 되자'는 소망을 담아 '신일반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1978년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0여년 전까지 만해도 돌잔치나 약혼식을 치를 만큼 규모가 큰 연회석을 갖춘 음식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