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8
   
▲ 사진은 책에서 스캔한 1973년 담방마을 전경. /사진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남동구 만수동(萬壽洞)의 경우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조동면(鳥洞面)에 대부분, 또는 일부분이 남촌면에 속해 있었다.

담방이, 새골, 산밑말, 장승백이, 구룡촌 등 자연취락을 형성했다.

이 마을들은 1842년과 관찬(官撰)한 <인천부읍지>에 담방리(淡芳里)와 곡동(谷洞)으로 기록됐다.

1897년 관찬한 읍지도 같으나 담방의 한자가 淡方이다.

그 이전 기록인 1789년의 <호구총수>는 조동면의 방리(坊里)로 1리, 2리, 3리를 올려놓았는데, 2리가 오늘의 만수동이라 보면 된다.


1903년 인천부가 관할 동네명을 확정할 때 담방리(淡方里)와 조동(鳥洞)으로 썼고, 1906년 5월 인천부가 동네명을 개정할 때 조동을 조곡리(鳥谷里)로 했다.

1914년 인천 일부와 부평을 합해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거기 소속시키고 만수리(萬壽里)라는 지명을 붙였다.

1940년 일제가 일본식 정명으로 바꿀 때 그대로 만수정(萬壽町)이 됐고,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만수동으로 됐다.

1961년 관보로 발간한 표준지명은 구룡골, 산밑말, 담방이, 장승백이, 담방이, 새골, 하촌, 비리고개, 쇄판, 만수천, 배렷 등을 촌락으로 올려놓고 경위도 표시를 붙여놓았다.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1994)는 새골, 비루고개말, 담방이말, 박촌말, 신촌, 구룡동, 산밑말 등을 수록했다.

인천의 인구가 점차 늘면서 자연취락이 몇 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담방이(淡方里)와 새골(鳥谷)이 만수동의 옛 촌락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담방이는 남동구청 앞에 담방마을삼거리라는 이름으로, 그 동쪽의 담방마을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인천지명고>는 1980년대 고장 원로들의 구술을 채록해 담방이 앞 방죽까지 밀려온 바닷물이 담방담방해서 붙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다른 자료를 보면 물속으로 물건이 떨어질 때 나는 의성어를 유래로 보기도 하고, 우리말 고어에서 둥글고 사방이 막힌 곳을 의미하던 '둠'에 기원을 두고 두밀과 두메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라는 해석도 있다.

모두 다 그럴 듯해 어느 것이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

새골은 만수주공아파트 동남쪽 인수초등학교와 남동정수장 부근이다.

새 조(鳥)로 썼으나 '억새풀'에 남아 있는 풀을 나타내는 우리말 '새'에 연원을 두는 설이 유력하다.

풀 많은 마을이라 새곡(草谷)이라 했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짐작으로 의미가 변하는 민간어원설에 의해 조곡(鳥谷)과 조동(鳥洞)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필자 선친을 비롯한 1세대 인천향토사가들의 견해이다.


박촌은 만수4동 주공아파트 주변이다.

박씨 집성촌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이 있으나 <인천지명고>는 선주성씨로 경주최씨, 파평윤씨, 해주오씨를 적고 있으니 믿기 어렵다.

젊은 향토사가들은 우리 고유의 원시제천행사 '한밝'에 연원을 두고 뒷산 만수산(해발 201m, 철마산이라고도 함)과 연관시켜 언어학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구룡골은 아홉 마리 용이 날아올랐다는 설과 함께 전하는데, 담방마을 동쪽과 고속도로 건너편 마을이다.

지금은 쓸모가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담방이에서 서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구룡고개라고 토박이들은 부르고 있다.

비리고개는 만수동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고개 앞마을이 산밑말이다.

비리고개의 경우 비류왕자가 넘어온 고개라는 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가족과 헤어지며 눈물을 흘리고 문학산 삼호현을 거쳐 능허대 포구로 가서 배를 탔다는 설이 있으나 호사가들이 만든 전설로 보인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1911년 발간 <조지지자료>에 성현(星峴)으로 기록됐는데, 별(星)과는 무관한 것 같고 우리말 지명을 훈차한 것으로 보인다.

국어학 전공 지명어원 연구가들은 경사진 언덕을 의미하는 우리말 '비사'에서 유래한 '벼랑'과 연관해 비탈진 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장수하는 마을을 나타내는 만수동은 1914년 명명된 지명인데, 정체불명이다.

일제강점기에 생긴 지명이나 일본보다는 중국식 지명에 가깝다.

<조선왕조실록>의 '길주(吉州)에 100세 장수하는 노인이 있어 임금이 상찬을 내렸다는 설과 연관해 그렇게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견강부회에 가깝다.

이곳이 길주와 멀고 지명을 붙인 것이 100년도 더 지나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남동구는 남촌면과 조동면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인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