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오래된 미래, 인천 골목
(14) 송월동 - 하얀 원통 건물,스케치북에서 사라지다
   
▲ 송월동 동화마을

응봉산 정상 관측소 철거 아쉬움

'인향야학' 학생들 배움 갈증 해소

구한말 전기·비누 등 신문물 발달

곳곳에 벽화 그려 '동화마을' 변신



자유공원을 품고 있는 응봉산 뒤편에서 격동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동네.

그 바다를 통해 기상관측, 전기, 비누 등 신문물의 보따리가 들어 왔다.

송월동은 어머니 품과 같은 동네다.

긴 항해를 마친 뱃사람들과 수 십리를 달려 온 철마가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참 묘하다.

인천이나 서울이나 기상관측소가 들어앉은 자리가 둘 다 송월동이다.

송월동(松月洞)이란 한자도 같다. 서울 기상관측소는 1907년 경복궁 근처 중심지역 날씨를 측정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금도 이곳 마당에 첫 눈이 내려야 '서울 첫 눈'으로 발표된다.

이보다 먼저 생긴 인천기상대는 우리나라 기상관측소 중 큰형님 뻘이다.

공교롭게도 두 관측소가 '송월'이란 이름과 연관이 있어 흥미롭다.

인천기상대의 주소는 정확히 말하면 전동이지만 인일여고와 긴 담으로 굳게 막혀 있고 정문이 송월동 쪽으로 나있어 심리적으로 이 동네에 속한다.

북위 37.28˚ 동경 126.38˚. 응봉산 꼭대기에 등지 튼 이 기상대는 자유공원 사생(寫生)대회의 단골 스케치 포인트였다.

많은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높게 솟은 철탑과 원통형 하얀 건물 기상대를 도화지에 그려 넣었다.

그림으로는 친근했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고 육중한 철문으로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이곳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기상대는 이제 출입이 자유롭다.

인천기상대가 문을 연지 100년이 되었다.

일제가 1905년 1월1일 응봉산 정상에 관측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이제 사생대회 아이들은 그 건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그 유서 깊은 원통 모양의 건물이 재작년에 사라졌다.

지난해 10월 22일 새 청사가 들어섰다.

낯설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놓인 기상대 봉우리의 실루엣이 영 어색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옛 본관 옆에 있는 작은 빨간 벽돌집은 그대로다.

"196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알고 있어요. 한동안 방으로 쓴 것 같은데 불탄 흔적도 있어요."

기상대 직원의 설명이다.

사실(史實)과 설명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

지난 2010년 2월 인천기상대에서 발행한 '인천기상대 역사를 찾아서'라는 자료집을 보면 이 창고는 1923년 4월에 준공된 것으로 적혀 있다.

90년 된 '고(古)건축물'이다.


기상대 정문 앞으로 내려가면 건너편에 자유유치원이 있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서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이 때문에 자리 바뀜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었다.

우아한 서양식 2층 석조 건축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총독이 눈독을 들일만큼 좋은 위치였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과 국군이 번갈아 사용하다가 인천상륙작전 때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5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송월초등학교가 그 곳에 세워졌는데 후에 건너편으로 이전하였고 그 자리에 북성초교가 다시 개교했다.

이 학교는 얼마가지 않아 송월초와 통합돼 폐교된 후 그 자리에 인천교육과학연구원이 들어섰다가 현재의 유치원에 자리를 내줬다.

어스름해지는 시간, 가방을 든 몇몇 사람들이 자유유치원 아랫길 계단을 서둘러 오른다.

허름한 2층 집 창문에서 간간히 새나오는 불빛이 골목을 밝힌다.

이곳은 인향야학이다. 7. 80년대 풍속도의 하나였던 야학(夜學)이 여전히 이곳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향야학은 문을 연지 52년이 되었다.

인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야학이다.

그 역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학교 건물을 찾아 지금까지 이사 다닌 것만 11번이다.

인향야학은 1962년 도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동장이 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1966년 용현2동 재건회관으로 쫓기다시피 옮겼다.

베니어판을 쪼개 칠판으로 삼고 절에서 불공하고 남은 양초를 모아다 불을 밝힐 만큼 열악했다.

교실도, 학습교재도 어느 하나 변변치 못한 여건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2년 동안 천막 교실 생활을 한 적도 있고, 어느 정비공장의 2층을 빌려 교실로 쓰다 공장이 부도가 나서 내쫓기기도 했다.

영어 교사로 봉사 나왔던 미군 두 사람이 부대에 있는 철근과 시멘트 등의 자재를 지원하겠다고 해 당시 빈터가 많았던 학익동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짓다 말다 하기를 반복하던 겨울 어느 날 강한 바람에 부실하게 골조만 올라가던 학교 건물이 폭삭 내려앉았다.

이후 몇 번의 짐을 싼 끝에 이곳 옛 송월동공부방 자리에 다시 불을 켰다.

요즘은 거의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주경야독'의 단어가 이곳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수업은 오후 6시 30분부터 4시간씩 하는데 2교시가 끝나면 라면이나 김치찌개 등을 끓여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지난 50여 년 동안 2000여명의 학생과 900여명의 선생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구한말 송월동에는 독일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적지 않게 거주했다.

산 남쪽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서 여유롭게 살았다.

그런 이유로 신문물이 들어와 이곳에서 발아하기도 했다.

1905년 6월 구미인, 청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 39명이 함께 출자해 인천전기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 지금의 송월동 남경포브아파트 자리에 발전소를 차렸다.

독일에서 가져 온 100㎾ 규모의 직류 화력 발전기 2대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전기가 들어온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개업 한 달 만에 1000여개, 2개월 후에는 1800여개의 등이 설치돼 인천의 밤을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인천전기는 한동안 그런대로 호황을 누려 1910년 말에는 690가구에 3,860 등을 공급했다.

급증하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는데다가 새 설비를 도입할 능력도 없어 결국 1912년 7월 일한와사전기에 매각되고 말았다.

그 후 이 회사는 1915년 9월 경성전기로 변경되었고, 1922년 7월에는 인천의 발전소를 폐지됨으로써 서울 용산에서 전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신문물 보따리에 싸여 들어온 것 중에 비누가 있었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은 1895년경이지만 본격적인 비누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2년 일본인 '오다'가 송월동에 '애경사(愛敬社)'를 설립하면서 부터다.

1954년 제주도 사람 채몽인 씨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주)'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애경'은 바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애경 사사(社史)에 의하면 '미향'이란 브랜드의 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팔아 당시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것이 오늘날 애경그룹의 모태이다.

앞서 언급한 채몽인 씨는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남편이다.


지금도 송월동에는 일본식 주택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송월교회 밑으로 모양이 비슷한 일식 주택이 눈에 많이 띤다.

동일방직과 이천전기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집들이다.

비탈에 집을 짓고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서 골목이 아기자기 하게 이어졌다.

세월에 못 이겨 퇴락하던 이 골목이 최근 대대적으로 화장(化粧)을 넘어 분장을 했다.

골목에 들어서면 마치 테마파크 입구에 들어선 느낌이다.

가스 밸브함을 이용해 만든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 나무꾼을 비롯해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 이름만으로도 친숙한 동화 속 장면들이 벽을 컬러풀하게 수놓았다.

골목 이름도 아예 '송월동 동화마을'이라고 붙였다.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주민 강태용 씨는 이제 곧 자신의 집도 칠해 줄 거라면서 큰 기대를 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삶도 동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램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송월교회 내리막길 옆에는 우물이 있다.

앞에는 녹슨 펌프도 있다.

길 가던 주민에게 물으니 오래전에 폐쇄 되었다는 말과 함께 밑에도 우물이 하나 더 있다는 정보를 준다.

밑의 우물은 뚜껑이 열쇠로 잠겨 있지만 얼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이 동네에서 60년 가까이 살아 온 오익환(88) 할아버지는 송월동의 변천사를 상세히 꿰차고 있다.

그는 천안에서 철도 관련 일을 하다 광복 직후에 인천역 근처로 전근 오게 되었다.

"인천역 근처에 부두가 있었을 때는 이 동네에 배를 부리는 선주(船主)들이 많이 살았지. 저 우물들 앞에 오징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씻었던 게 엇그제 같은데… 암튼 이 동네는 산 밑이라 그런지 물이 좋아. 아무데를 파도 물이 나왔지."

송월동에는 일본식 가옥들뿐만 아니라 오래된 한옥이 많이 남아있다.

송월초등학교 아래 쪽으로 가면 인천에서는 이제 보기 드문 기와집 골목이 나온다.

1950년대 중반에 조성된 도시형 한옥촌이다.

건립된 지 반세기가 넘다보니 곳곳이 낡았지만 골목에는 기와집의 우아한 자태와 기풍이 여전히 흐른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 그때, 이 곳>

 

   
▲ 옛 인천기상대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

인천기상대 정문 한 켠 방공호 안에 있는 지진관측소는 한국최초 지진관측의 시발점이다.

우리나라의 지진관측은 1905년 3월24일 인천관측소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이 측정계는 설치 이후 1943년까지 인천의 지진을 측정했으나 1945년의 광복과 1950년 6.25 전쟁으로 중단된 뒤 20여 년 동안 암흑기를 보낸다.

1963년 3월 기상청은 지진측정기가 설치됐던 그 자리에 세계기지진관측계를 다시 설치한다.

이 관측소는 지난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보도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날 이 지진계의 바늘은 백령도 앞바다의 수중음파가 전달되면서 잠시 몸서리를 쳤다.



▲오포와 싸이렌

오포는 1906년 2월 처음 실시했다.

홍예문 위에 있던 인천상비소방소의 감시탑에서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던 192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점심때가 되면 공습경보를 알리는 듯한 긴 사이렌 소리가 정오를 알렸다.

광복 후, 사이렌 소리는 정오가 아닌 자정에 울렸다.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청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를 통행금지 시간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금 싸이렌 소리는 인천의 밤하늘을 매일 '엄습'했다.
 

   
▲ 송월시장

▲송월시장

현재의 만석고가교(인도교) 옆에 1937년 2월 설립된 가축시장이다.

질퍽한 부지에 특별한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키우던 곳이라 하여 흔히 '말깐(말간)' 또는 '돼지장터'라 불렀다.

광복 후 만석동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많이 이용해 한때는 꽤 번창했던 시장이었으나 철도 건널목이 담으로 막히면서 만석동과 단절이 되면서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