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오래된 미래, 인천 골목
(13) 송학동 - 담쟁이 뒤엉킨 돌축대만이 그 영욕을 아는 듯
   
▲ 자유공원을 찾은 노년의 한 손님이 물건을 구입한 뒤 공원매점을 나서고 있다.

송학동은 부자 동네였다. 사람 키 서너 배 넘게 쌓은 돌 축대와 담쟁이로 둘러싸인 높은 담장 그리고 넓은 정원과 육중한 철문.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저택들이 바다를 향해 자리잡고 있었다. 실제로 4, 5대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씨 등 고관대작이나 항만관련 사업을 하던 경제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서울사람들이 이 동네를 지나가면서 '인천에도 성북동 같은 동네가 있네' 하고 의아함과 놀램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동네가 바로 송학동이다.

송학동은 동네 자체가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송(松)' 자로 시작하는 송현동, 송림동, 송월동과, 그리고 '학(鶴)'자 돌림의 청학동, 선학동, 문학동과 헷갈려 정작 인천 사람들도 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중구 송학동은 자유공원(응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동네이다. 앞 쪽으로 막힐게 없어 인천 앞바다가 고스란히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송학동은 자유공원의 일부를 품고 있다. 바다와 항구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유공원은 한때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다. 주말이면 웨딩마치를 막 끝낸 신혼부부를 태운 오색테이프로 치장한 대절 택시들이 공원 언덕길을 쉴새없이 오르내렸다. 수도권에 설던 사람치고 맥아더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인천에 놀러왔다는 인증샷은 무조건 장군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 자유공원 수병동상 너머로 맥아더 동상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란 타이틀이 붙은 공원이지만 조선총독부 고시 13호에 의하면 자유공원은 1944년 1월8일자에야 비로소 '공원'으로 결정된다. 그 이전은 그냥 공원으로서의 기능 혹은 호칭이었을 뿐 행정적으로 결정된 것은 광복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조망이 좋은 덕분에 자유공원은 '자유'롭지 못했다.

6.25 전쟁 중 공원 일부는 군에 징발돼 대공포와 참호 등 군 시설과 막사가 차지했고 전후에도 한동안 곳곳에 군 콘세트 건물들이 있었다. 1969년 모 사업자가 공원 정상에 관망탑을 건축하겠다고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적도 있고 현재의 공중화장실 부근에 아파트를 건립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 절정은 1972년 다목적용 '자유의 타워' 건립 계획이었다. '70년대 인천시사'에 의하면 당시 어린이놀이터(현 한미수교10주년기념탑) 자리에 전망타워를 건립하는 계획이 경기도로부터 사업승인을 얻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타워는 연건평 2만2,100㎡(6700평)에 지하 1층 지상 13층 탑층 38층 등 총 52층 높이의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압권은 이 전망대와 월미도 간 케이블카로 연결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자로 추진되는 이 모든 계획이 1980년대 초기에는 분명히 성사될 것으로 그 '시사'는 예견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자유공원은 산책로에 줄지어선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유명하다. 이 나무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심은 것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다. 1975년 인천라이온스는 일본 나가사키, 기타규슈 등 자매 클럽의 도움으로 3년 계획으로 1000주를 심었다.

이제 자유공원은 추억의 공간이다. 세월이 흘러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설들로 공원은 언제 어느 때나 찾아도 푸근하다. 응봉산이 바다로 내쳐 달리다 급정거를 하며 깎인 지점에 늘 그림처럼 서 있는 팔각정, 석정루. 목재업과 조선소로 큰돈을 벌었던 이후선 사장이 30여 년간 자유공원을 산책하며 건강을 지켜온 데 대한 보은으로써 1966년 시민의 휴식처가 될 2층 누각을 지어 인천시에 기증했다. 그는 공원 내에 있는 많은 자연석도 기증했다. 출생지가 월미도였던 연유로 월미도를 바라 볼 수 있는 공원 서쪽 언덕바지를 누각의 위치로 정했다. 누각명은 주변의 강권으로 자신의 아호를 따 '석정(石汀)루'다. 당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서예가 박세림 선생이 현판 글씨를 썼다.

이보다 앞서 한미수교기념탑 쪽에는 '연오정(然吾亭)'이란 육각형 단층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송현동 100번지에 살던 조길 씨가 그의 부친인 독립운동가 조훈 선생이 생존 시 당부한 뜻을 받들어 1960년 8월 350만환의 공사비로 건축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장구 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며 풍류를 자주 즐겼다.

사라진 것도 있다. 공원 광장에는 여러 층으로 된 비둘기 집이 있었다. 광장과 비둘기는 공원의 한가한 풍경을 완성시키는 소재였다. 1967년 대성목재에서 190쌍의 비둘기가 서식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집을 마련해 주었다. 70년대에 이르러 비둘기가 1천 쌍으로 늘어나자 수원시와 여주군에 분가 시키기도 했다. 1996년 주변 환경을 위해 비둘기 집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배 모양의 전망 데크가 설치되었다. 집 잃은 비둘기들은 어디로 둥지를 옮겼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일제강점기 소월미도에는 인천관측소와 일본군 군용기지를 오고 가는 전서구(傳書鳩: 통신용 비둘기) 사육장이 있었다.

'인천관측소에서 매일 아침 작성되는 기상표도(氣象表圖)는 한차례 결항됨이 없이 인천에서 경성 여의도비행장으로 운반되어 그날그날의 항공 여객과 항해 여객에게 안심하고 유쾌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화로 보낼 수 없고 기차로는 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인천 경성간의 기상도 체송(遞送)을 전서구 날개에 맡길 때에는 겨우 15분에서 30분쯤 걸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나 어렵지 않게 날라 가게 되는 것이다.'

전서구의 활약상을 알리는 1932년 7월 동아일보 기사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자유공원 비둘기는 세월이 흘렀지만 전서구의 후예인 듯 간혹 경계를 넘어 갈매기 영역 바다를 비행하기도 한다.

요즘의 공원은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공원에 나와 '왕년에 내가 말야…'하며 서로 말동무를 자처한다. 이 공원의 풍경을 더욱 더 빛바랜 사진처럼 보이게 하는 소품 중에 하나가 공원매점이다. 학도의용대 기념탑 옆에 있는 정자처럼 지은 매점은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한다. 반가운 마음에 매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집이 몇 년이나 됐습니까?"

"공원에 놀러 오는 할아버지들이 그러시는데 50년은 족히 됐고 60년이 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데요."

아, 문화재감이네. 온 식구가 공원에 나들이 오는 날은 분명 집안에 경사가 있거나 먼 곳에서 친척이라도 온 날이다. 그날 아이들은 이 매점에서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장난감 총이나 바비 인형을 하나 챙겼으리라.

매점 옆에는 철제 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TV난시청 중계탑이고 또 다른 하나는 4개의 확성기가 달려 있는 '사랑의 탑'이다. 1965년 인천로터리클럽에서 세운 이 탑은 80년대 말까지 매일 밤 10시만 되면 사방팔방으로 '계도방송'을 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공원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갈 정도였다. 당시 계도방송을 들었던 청소년들은 이제 자신의 아들, 딸 혹은 손녀, 손자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나이가 될 만큼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 개나리가 핀 홍예문 전경.

반세기 동안 송학동의 모양은 많이 변했지만 이 동네의 풍치를 그런대로 간직하게 하는 것은 100년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돌문 때문이다. 이 문은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했다고 해서 '홍예문(虹霓門)'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다, 이름에 걸맞게 담쟁이 넝쿨이 계절에 따라 고즈넉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지만 이 문은 슬픈 역사를 품고 있다.

1883년 개항 후 중앙동, 신포동 일대에 터를 잡은 일본 거류민들은 전동과 만석동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문을 내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도 산의 혈(穴)을 뚫었다고 생각했는지 일본인들은 이 문을 '혈문'이라고 불렀다. 일본조계에서 경인철도의 축현역(현 동인천역 부근)으로 우마차를 이용해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암석 폭파 등 토목공사에 앞장섰고 중국인 석수장이와 한국인 노무자를 동원하는 등 난공사 끝에 3년이 지난 1908년에 완성했다. 지금도 문 앞 벽에는 쪼아내다 내버려둔 거대한 암석의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홍예문의 높이는 13m이다. 7,80년대 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이만한 높이의 개방된 건축물이 별로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의 빠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자살터'. 사고가 이어지자 이후 높다란 철책이 둘러쳐졌다. 당시 동인천 쪽으로 통학하는 인성여고생들은 자살 사건이 나면 한동안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신포동 쪽으로 돌아서 다니곤 했다.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높이도 6.7m의 폭도 그대로다. 당시 우마차는 교차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자동차로는 어림없다. 양쪽 오르막을 냅다달려 온 차들은 고개 정점인 이 문 앞에서 '우선멈춤' 해야 한다.
이 돌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라고 묵묵히 얘기하고 있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자유공원 방공호.

▲ 자유공원 방공호
일본인들, 특히 어느 정도 지위에 있던 이들 많이 살던 송학동에는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들이 있다. 맥아더장군 동상 뒤편 주차장은 예전에 롤러스케이트장이었고 한동안 나대지로 있을 때는 학생들의 '결투'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에 동상 밑으로 뚫린 천정이 아치형으로 된 방공호가 있다. 인민군들이 폭약 저장소로도 사용했다. 옛 시장관사로 사용한 인천역사자료관의 방공호는 6.25전쟁 때 인근 시립박물관의 유물을 잠시 보관했다.

문화재급 유물 19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빌려온 55점 등 유물 200여 점을 포장해 옮겨 놓았었다. 석정루 아래에 있는 방공호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데 레스토랑의 와인 저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 공회당.

▲ 공회당
6. 25전쟁 중에 소실된 공회당에서는 음악회뿐만 아니라 강연회가 활발히 열렸다. 1924년 4월 죽산 조봉암이 뒷날 아내가 된 여성 사회운동가 김조이와 함께 이곳에서 명강연으로 500석 좌석이 가득 찬 인천청년들을 사로잡았다.

1933년 11월에는 현제명의 독창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1957년 3월 1일에 인천시립시민관이 개관해 당시에는 인천시가 직접 극장으로 운영하다가 1958년 5월에 위탁경영으로 전환하였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인성여고 체육관이 들어서 있다.
 

   
▲ 아끼다 쯔요시 주택.

▲ 아끼다 쯔요시 주택
러일전쟁으로 번 돈을 인천에 가져와 여러 사업을 한 일본인 아끼다의 호화로운 흔적이 남아있는 저택이다.
건물과 정원이 아름다웠고 후에 '은수루'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는데 현재 대문의 문주와 진입부 계단 그리고 석축이 남아 있다. 한동안 중구청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중구청 어린이집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