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동, 시간과 공간이 곱게 늙은 동네

열혈청년 김구 인천서 독립운동가로 재탄생

전사추모 교회·최초 도선사 집 등 옛정취

원조급 크라운볼링장 40년 넘게 운영 중

80년된 일식점포겸용 주택은 카페로 보존

 

   
김구 동상

한때 '안골말'이라고 불리던 내동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골목어귀에서 파란 눈의 선교사와 구한말 조선의 관리들을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언덕 마루턱에는 백범 김구의 정신이 흐른다. 그는 이곳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르며 신서적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뜬다. 인천축항에서의 강제노역과 인천민들의 구명 운동 등을 통해 '의열청년' 김창수는 '독립운동가' 김구로 다시 태어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라고 말했다.

백범 김구는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지방 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다. 인천과는 어떠한 인연이 있길래 그는 서둘러 인천으로 발걸음을 했을까.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한 그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했다. 이른바 '치하포사건'이다. 이 일로 5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해주감옥에 수감됐다가 당시 가장 힘든 감옥이라고 알려진 내리(내동)의 인천감영(인천감리서)으로 7월 26일 압송되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바로 직전 고종 황제의 사형 집행 정지령이 내려지고 무기수로 감형되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내리로 왔다. 인천항 내의 유명한 물상 객주집에 기숙하면서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거들며 아들에게 하루 세 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 주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인천축항공사에 조선인들이 투입돼 강제노역을 하고 있다.

이후 김구는 1911년부터 안명근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14년 인천감옥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죄수번호는 55호였다.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다가 1915년 인천감옥에서 가출옥되었다. 이렇듯 인천은 1919년 상해 망명 이전 김구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감당했던 곳이다. 그가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라며 해방 후 맨 처음 인천을 순시한 이유는 당연하고 충분한 것이다.

 

   
옛 감리서 터

백범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른 인천감리서는 조선정부가 1883년 내동 83번지 마루턱에 설치하였다. 개항장 제물포의 조계지 관리를 비롯해 외국인 입출항의 외교업무와 무역·관세의 통상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감리(監理)를 파견했다. 감리아문 청사는 한옥 단층 건물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옥에 유리창이 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은 커다란 삼문(三門)으로 열려 있었다.

후에 감리서는 인천부(현 인천시청)의 역할에 개항장재판소와 학교 기능까지 함께 한다. 행정, 사법 기능에 교육기관이 들어선,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복합행정타운'이었다. 눈에 띠는 것은 감리서에는 감옥이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죄인이 볼기 맞는 비명소리가 담장을 넘어 인근 민가에 들렸다고 한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인천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다. 개교 당시 학생수는 30명으로 수업 연한은 4년이었다. 첫 졸업식에는 9명, 2회 때는 단 한 명만 졸업했다. 이후 공립상업학교로 개편되고 1922년 현재의 송림초교 터로 이전하게 되는데 후에 이 학교가 바로 인천고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언덕에 아파트를 세운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1972년 2월에 법원이 석바위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대한준설공사가 들어섰다. 이 회사는 후에 한진그룹에 속하고 1990년 한진종합건설이 된다. 한진은 1996년경 이 건물을 헐고 '인천신포스카이타워'라는 지하 2층 지상 12층의 아파트를 짓는다.

거대한 성채와 같은 이 아파트는 응봉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월미도를 휘돌아 올라오는 바닷바람을 막으며 갈라놓았다. 현재 옛 감리서 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풍만한 몸매의 세 명의 나체 연인상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아파트 상가에 입주한 불가마 사우나에서 세운 듯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터에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끌어내 볼기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아파트 바로 옆에 자유공원과 신포동을 이어주는 언덕길이 나있다. 적당히 경사진 산자락에는 이국풍의 예배당과 세월을 품은 주택들이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이 길을 경계로 왼쪽은 외국인 조차지, 오른쪽은 조선인 부락이었다. 언덕길은 성공회 내동교회로 이어진다.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1956년 현재의 위치인 성누가병원 부지에 교회를 다시 지었다. 내동교회는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영국전몰장병을 추모하기위해 그 유가족들이 모금해 건축한, 일종의 전쟁기념성당이다. 50년대 말 까지 교회 안뜰에는 대공기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내동교회를 얘기하면서 의사 랜디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조선식 온돌이 있는 성누가병원을 열고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낙선시(樂善施·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준다)'라는 병원이름을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회 뜰을 거닐다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안내문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국 최초 도선사 유항렬 생가

내동교회 언덕길을 내려오면 붉은 서양식 주택이 하나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흔히 '내동 벽돌집'으로 부르는 유항렬 저택이다. 유항렬은 한국 최초의 도선사(導船士)이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선사 자격증을 땄다. 조선우선주식의 선박 선장으로 인천~칭따오~상하이간을 운항한 바다 사나이다. 해방 후 일본인 도선사들이 모두 떠났을 때 구호물자를 실은 선박들을 홀로 인천항으로 안내했다.

그가 살던 이 주택은 223㎡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1933년에 지어졌다. 건축한 지 8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튼실하게 보인다. 벽돌아치와 굴뚝 등이 이국적인 모습을 풍긴다. 이 저택은 복도를 통해 각 실로 연결되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다다미를 깐 일본식 방과 목조 게단 등 일본식으로 지어졌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테라스. 이 테라스는 남쪽으로 나지 않고 서쪽으로 향해 있다. 그 서쪽에는 팔미도가 있다.

그는 이곳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 앞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리 각도를 잡아도 팔미도가 보이질 않는다. 그만큼 바다가 멀어졌다. 안이 궁금해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다. 바로 옆의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집에 사람이 사나요?", "오늘은 없을 거예요. 주말에 가끔 서울사람들이 와요." "누가 오는 건가요.", "그 후손들이 오는 것 같아요."

건축은 한번 세워지면 사람의 수명보다 긴 세월을 버티며 동네를 지킨다. 이제 그 누구도 테라스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를 바라보지 않지만 그 집은 언덕에 기댄 채 바다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40년째 정상 운영중인 크라운 볼링장

내동에서 중앙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크라운볼링장이 나온다. 1968년 원래 미군 댄스홀이었던 곳을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로 문을 연 원조급 볼링장이다. 한때 이곳에서 볼 좀 굴려야 인천의 멋쟁이 소리를 들었다.

학생시절 그곳이 궁금해 쪽문으로 훔쳐보았던 적이 있다. 자동화되기 전에 핀을 일일이 손으로 세웠던 핀보이들의 험상궂은 시선에 뒷걸음쳤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쪽문은 정문으로 정문은 쪽문으로 바꾸며 래인의 방향도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 던지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 40년 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동네 풍경의 한 소재(素材) 역할을 하는 크라운볼링장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80년의 시간을 보존한 건물 하나가 얼마 전 살짝 '성형'을 했다. 관동1가의 카페 '팟알(pot_R)'은 1933년에 지어진 근대 일본의 점포겸용주택 '마치야(町家)' 양식의 건물이다. 좁은 통로를 따라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중정(中庭)이 있고 정원 옆에는 작은 살림집이 들어서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하역회사였다.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2·3층의 다다미방에선 1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며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배를 기다렸다.

'팟알'이 들어서기 전 까지 살던 전 주인은 이 적산가옥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하역회사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고 해방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장에게 이 집을 물려 받았다. 77년간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바뀐 적 없는 고집스런 주인은 이 집을 거의 건들이지 않고 2대에 걸쳐 살아왔다. 3층의 기울어진 벽에는 1920년대 요미우리신문, 1900년대 일본벽지, 포스터 등이 붙어있고 일본어 낙서가 가득했다. 이중 삼중으로 덧바른 벽지가 보물 창고였다.

이 건물은 한 때 창대건강원으로 운영되다가 이후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1층은 카페로 운영되고 2,3층은 전형적인 일본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소모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옛 인천우체국 건너편에는 신포공영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오면 오페라의 음률이 귓가에 맴돈다. '나비부인(Madam Butterfly)'는 푸치니가 작곡한 2막 3장의 오페라이다. 일본의 기녀 나비부인이 미국의 해군장교 핑커턴에게 버림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비극적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주인공의 딸이 인천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능대학 손장원 교수는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야마무라 쓰루의 딸 글로버 하나가 인천으로 시집와 살다가 외국인묘지에 묻혔다고 밝혔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글로버는 1861년 24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글로버상회를 설립해 선박과 무기를 판매한 무역상이었다. 그가 일본에 팔았던 선박 중에는 조선을 침략할 때 건너 온 '운요오호'도 있었다.

토마스 글로버는 일본에서 사업하며 이혼녀 야마무라 쓰루와 결혼한다. 그녀는 나비가 수놓아져 있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고 해 '나비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야마무라는 오페라 속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나비부인과 달리 실제로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둘 사이에 1남 1녀가 태어났는데, 그 딸이 글로버 하나이다. 글로버 하나는 나가사키에서 영국인 월터 베넷와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 베넷은 인천으로 건너와 베넷상사(광창양행)를 설립해 사업을 벌였다. 그 자리가 바로 현재 신포공영주차장 터이다. 이곳 사택에서 글로버 하나와 신접살림을 차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기록에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인천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영국 인천영사관(현 파라다이스 호텔 터)에서도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1938년까지 살다가 70세의 나이로 사망해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한진그룹 창업 터

▲한진그룹 창업 터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1945년 중구 해안동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트럭 한 대를 갖고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상사는 1950년에 종업원 40여 명에 트럭 30대를 보유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 그동안 이룩한 것을 모두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1953년 다시 인천에 돌아와 회사 재건에 힘을 쏟았고 이후 육해공 분야에 독보적인 회사가 되었다. 한진이 처음 창업한 곳은 인천일보 윤전실 옆 건물과 길 건너 옛 인일철공소 자리로 추정된다.

 

   
아침바다

▲아침바다
이 건물은 1942년에 신축되었다. 일부 1932년경 신축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와야 철물점을 운영하던 가와바타가 세운 창고로 외벽이 붉은 벽돌로 돼 있다. 1954년 민간에 불하돼 한동안 설계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최근까지 '아침바다'라는 레스토랑이 운영되었다가 현재는 장기간 휴업 중에 있다. 마름모꼴 창문 좌우에 철제 덧문을 부착한 것이 이채롭다.

 

   
인천정미소

▲인천정미소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인천정미소는 1889년 3월에 설립되었다. 당시의 풍경은 기선이 제물포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길이 닿는 것이 나무 한 그루 없는 인천항의 산언덕 아니면 맹렬하게 검은 연기를 공중에 뿜어내는 인천정미소의 굴뚝이었다고 한다. 인천정미소는 여러 대의 증기기관을 갖추고 밤낮 없이 작업을 하였으며, 개업 이후 정미한 쌀이 수 만석을 넘었다. 현재 현존하는 것은 굴뚝과 부속 건물이다. 현재 부속건물은 개인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우재

▲상우재(尙友齋)
대지 140평의 이 집은 1930년대 일본인 도립병원장이 지어서 살았고 6·25전쟁 직후 미군 고위 장교가 한동안 살았다. 문고리, 현관문, 창문모양, 복도 등 집 구조는 기본적으로 일본식이지만 미국인, 한국인 등 거주하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거실에 벽난로를 설치했고, 방문은 일본식 미닫이에서 서양식으로 바뀌었으며 방바닥은 한국식 온돌을 깔았다. 한미일 퓨전식 주택이다. 리모델링 중 천장에서 미군 장교가 넣어둔 듯한 임진강 유역의 군사지도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 아픈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이 집은 2012년에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