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북성동, 선창가 바람 붉은 풍등風登 흔들다


130여년전 화교 터 잡고 중국촌 형성 … 인천중산학교 자리 中정체성 간직해

인천역 뒤편 새우젓·소금 팔던 난장들 … 연안으로 부두옮겨 지금은 흔적만

 

   
▲ 북성동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많이 정착한 곳이다. 중국인들이 살던 건물이 즐비한 차이나타운 비탈길을 한 사람이 걸어 내려오고 있다.





130여년 전, 낯선 말투와 차림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산으로 올라와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낯선 음식 춘장 볶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사관, 학교, 사찰이 들어서면서 그곳은 중국촌이 되었다.

그 아래, 응봉산 줄기가 내처 달리다 바다와 맞닿은 곳은 고기잡이배 포구와 선창가가 되었다. 독(dock)이 생기기 전에는 바다의 물 끝이 경인선 철도가 끝나는 지점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 100주년기념탑이 서 있는 곳까지가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濟物浦)'였다. 독 공사로 1973년 부두시설이 새 바닷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부두는 옮겨갔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비릿한 선창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북성동 차이나타운을 '중국촌' 답게 하는 것은 청요리집이나 중국 관련 상점이 아니다.

1세기 넘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중국 동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화교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구 북성동 8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화교학교의 정식 명칭은 인천화교중산중·소학교(仁川華僑中山中·小學校)이다. 이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1년이다.

 

   
▲ 인천화교중산학교.

 



처음 학교 문을 열었을 때는 초등학교 과정인 소학교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화교학교의 효시다.

화교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때는 1882년(고종 19)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 때 조선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여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 1884년 인천 북성동에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설치되면서 1000여명의 화교가 거주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중국 영사부의 주도로 마침내 학교가 설립되었다. 화교학교는 화교사회의 번성과 침체에 따라 그 학생수가 증감했다. 인천의 화교들은 북성동 주변에 모여 살다가 점차 주안, 용현동, 부평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곳에도 작은 화교사회가 형성되면서 학교가 세워졌다. 1946년에 주안분교, 1951년에 용현분교와 부평분교가 설립되었다.

20여년 전만해도 인천중산학교 초·중·고 전교생 1500여명에 이르렀다. 농구 코트 서너 개 크기의 운동장에 함께 모이면 말 그대로 '바글바글'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소학교 교장, 중고등학교 교장이 따로 있을 만큼 학교 규모가 컸다. 지금은 전교생이래야 400여명에 불과하다. 그들 모두 화교는 아니다. 초등학교에는 30%, 중고등학교에는 15%의 한국인이 있다. 화교 학생 중에도 아버지가 화교, 어머니가 한국인인 경우가 절반 정도로 순수 화교학생의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니다. 몇 년 전부터는 중국본토 출신 학생도 20여명 재학하고 있다. 대부분 취업을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의 자녀들인데 점점 느는추세에 있다.


인천중산학교는 대만 정부의 것이다. 중국 소유가 아니다. 1992년 8월 우리나라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수교하고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했지만 화교학교는 여전히 대만 정부의 소유이고 대만으로부터 학비 보조금을 받는다. 매년 졸업생 중 10명 정도는 대만대학에 진학한다. 1980년대 까지는 대만교육부에서 매년 6월 한국으로 건너와 화교들을 대상으로 대만대학 입시를 주관하기도 했다. 한국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주로 한의대, 공대, 무역학과 등으로 진로를 잡고 있는데 외국인학교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화교학교 학생들은 한국대학에 가려면 검정고시를 치러야 한다.


1950년대 중반 인천중산학교 졸업생 중에 '이수영'이 있었다. 그는 인천의 당면 공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다. 1944년 인천에서 출생해 이 학교를 다니다 13세 때 대만으로 건너가 대북국립예술전문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다. 18세의 그녀는 1961년 미스 차이나에 뽑혔고 그해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에서 2위로 입상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준(準)월드미스에 뽑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1962년 1월 25일 이수영은 김포공항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유중국 대사 부부, 화교 200여명, 미스 코리아 진선미 등 많은 사람들이 환영 나왔고 며칠 후 고향 인천시민회관에서는 시민들이 장내를 꽉 찬 가운데 '미스 차이나의 밤'이 성대하게 열렸다.
 

   
▲ 옛 차이나타운 모습.

 

 



흔히 차이나타운 하면 짜장면 동네로 생각한다. 짜장면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짜장면 없는 '중국집'이 있다. 중산학교 바로 정문 앞의 복래춘(福來春)은 4대째 꽁신삥(공갈빵)과 웰빙(월병)을 굽고 있는 중국 전통과자점이다. 지금은 곡회옥(曲懷玉·65) 씨와 그 아들 곡사충(曲士忠·33) 씨가 화로 앞에서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곡 씨의 할아버지는 192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월병을 팔기 시작했다. 곡 사장에게 복래춘의 웰빙 역사를 들려달라고 하자 말없이 벽을 가리킨다. 상점 벽에는 '월병 가계도'가 걸려 있다. 곡 씨의 가계(家系)를 그린 그 종이에는 월병의 기술을 전수한 가족들의 이름을 빨간색 테두리로 표시해 놨다. 가게 곳곳에는 월병 무늬를 찍어낼 때 사용한 나무틀 등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복래춘은 처음에 공화춘(현 짜장면박물관) 근처에 있다가 50여년 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19세부터 빵을 굽기 시작한 곡회옥 씨는 인천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 전통과자를 만든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자부심을 담아 복래춘의 포장지에는 '백년전통노점(百年傳統老店)'이라고 적혀있다.


차이나타운 아래, 인천역 뒤편은 바닷사람과 바다물건이 모여드는 왁자지껄한 선창가였다. 인천의 섬을 오가는 객선부두와 물위에 뜨는 잔교(棧橋)가 있었고 앞바다에서 걷어 올린 생선을 경매하는 깡시장 공판장이 있었다. 현재 이곳은 독이 만들어졌고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 만선 고기잡이 배에 화색돌던 옛'객선부두'모습.

 

옛 선창가, 인천항 8부두 정문 건너에 작은 동네가 있다. 큰길에서 살짝 들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을 새우젓골목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새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창고와 가게들이 있었다. 사시사철 골목 이곳저곳에 새우젓 독이 일렬로 사열하듯 세워져 있거나 빈 통으로 나뒹굴었다. 김장철이 되면 사람들은 양동이 하나씩 들고 열차를 타고 오거나 자유공원 응봉산 고개를 지게 지고 넘어왔다. 파는 이와 사는 이의 흥정소리와 악다구니가 골목 밖으로 넘쳐나갔다. 골목에는 새우젓뿐만 아니라 건어물 가게들도 함께 있었다. 부두가사라지면서 새우젓도 함께 떠나버렸다. 빈 창고와 가게에 인근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들어와 구들을 놓았다. 쪽방촌이 되었다.
 


"난장이었지. 길바닥은 늘 물기로 진창이었고 지나다니다 물건끼리 사람끼리 부딪히고, 바다 끼고 사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다보니 자주 싸움박질하고…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었지. 그때가 많이 그리워."

아파트 마당 그늘 평상에서 쉬고 있는 박치국(77) 할아버지가 잠시 옛 모습을 회상한다. 그는 평안도에서 피난 나와 북성동에 거주하면서 조그만 배의 기관장으로 일하며 늘 바다를 끼고 살았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옛 모습의 조각 하나를 툭 던진다. "저쪽에 한번 가 봐요. 그 골목이 뱀 골목이요. 뱀 장수들이 야한 얘기를 곁들이면서 뱀과 약을 팔았어."

아파트 담장을 끼고 도니 뱀처럼 살짝 휘어진 인적이 끊긴 골목이 나왔다, 주저앉은 집, 사람 살지 않는 집, 바람에 나뒹구는 쓰레기들. 이제 그곳은 뱀이 나올 만큼 스산하고 퇴락했다. 서둘러 돌아 나오려는데 뒤에서 뱀장수의 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들은 가라."

선창가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은 파라다이스호텔(옛 오림푸스) 밑 만석고가도로 옆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석축 위에 1958년경에 설립된 해무청사(인천해운항만청)가 있었다.

건축미가 뛰어난 격자무늬의 이 건물은 서울올림픽공원 정문 설계자 김중업 씨의 작품이다. 이후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헐리고 다시 짓고 1993년 국립식물검역소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바다와 전혀 관계없는 업체가 들어와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이국풍의 러시아 인천영사관이 있었다. 6·25 때 함포사격에도 살아남았던 이 건물은 1974년에 철거되고 만다.

그 라인에는 아직도 그물을 비롯해 배에서 쓰는 어구들을 파는 선구점(船具店)들이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빨간 벽돌집 앞에 섰다. 이쪽저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주인이 나왔다.

"왜 찍어요?"
"아, 좀 오래된 것 같아서요"
"다 낡은 거 뭐 좋다고…"


다소 못마땅했지만 안주인은 바로 집의 이력을 술술 풀어준다. 이 집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아버지가 지금의 아트플랫폼 근처 폭격 맞은 창고 벽돌을 얻어다가 지은 집이다. 현재 4대에 걸쳐 사는 이 집은 창문틀 양식이 일제강점기 때의 그것과 흡사하다. 시아버지가 일러 준 것에 의하면 송월동에 있는 옛 비누공장 애경사의 벽돌과 재질이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벽돌의 나이는 7,80년은 족히 됐다는 얘기다.



북성동 1가 1번지, 송월동에서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육교로 철길을 건너 만석동 우체국 옆길 동네를 지나가면 옛 외국인 묘지 자리가 나온다. 응봉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땅이 바다 끝에 멈추면서 구릉처럼 조금 불쑥 솟았다. 개항 이후, 주로 인천에 거주하다 사망한 서양 상인, 선교사, 외교관 가족들의 유해를 안치하려고 조성한 묘역이다. 1887년 7월에 첫 시신이 매장되었다.

뒤를 이어 상인 타운센드, 헤르만 헹켈, 의사 랜디스 박사, 청국 외교관이었던 오례당 같은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묘는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묘역은 철도 부지로 편입되었고 지금은 높은 담장 안으로 둘러쳐져 있다. 고작 한 움큼쯤 되는 붉은 언덕에 어지럽게 줄기를 뻗은 아카시아 몇 그루만이 한에 사무치는 듯 고요 속에 기울어져 있다.

처음에 묘지를 바닷가에 자리 잡았던 것은 언젠가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묻히리라는 간절한 바람이었으리라. 옛 묘역에 서니 그 영혼들이 바닷바람 따라 자신들의 고국으로 잘 돌아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 그 때, 그곳



   
▲ 러시아영사관 기록사진.


▲러시아영사관
파라다이스 호텔 밑, 인천역 길 건너에 있던 2층짜리 러시아 인천영사관은 1903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러시아는 경성 영사관 내에 부영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평양, 진남포 등을 관할케 했는데 1902년 10월31일자로 부 영사관을 인천에 이전 설치하였다. 1904년 제물포해전(러일전쟁) 후 영사관이 폐쇄 당했으며 일본 육군 운수부에서 사용했고 해방 후 우리나라 해군과 인천해사출장소로 사용하다가 1974년에 철거되었다.



   
▲ 국제마라톤대회 기록사진.


▲국제마라톤대회 기념비
1959년 9월28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회라 할 수 있는 '제1회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1966년 3회 대회 때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우승한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참가했다. 우리나라 마라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해안동 로터리에 인천시는 66년 6월 '제1회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 기념비를 세웠다.



▲해망대산
현재 파라다이스(옛 오림포스)호텔이 자리한 해망대산은 언덕 수준이지만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었다. 봉화대가 있었고 바다를 향한 대완구(대포)가 있었다. 개화기에는 한때 영국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로 폐허가 돼 빈터로 남았다.



   
▲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중부경찰서 정문 옆 화단 안에는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 설립 120주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소에 2007년 7월22일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에 의하면 네 명의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들은 지난 1888년 7월22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순교의 땅'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