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석동, 근대·산업화 겪으며 깊게 패인 굵은 주름

   
▲ 북항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는 만석부두

1906년 일본인 갯벌 메워 매립지 조성

조선인 집 몰아내고 홍등가·공장 세워

조선기계제작소, 日잠수함 만들기도


아낙들 채취한 굴껍데기 까던 '굴막'

포구둘레길 만들어지면 철거될 위기



한 세기 전 만석동은 인천의 '신도시'였다.

일제는 갯벌을 메우고 산업단지와 위락시설을 유치하면서 신천지의 꿈을 키웠다.

이로 인해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을 품은 괭이부리섬(묘도)은 깡그리 파헤쳐져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그곳에 '아카사키'라는 일제의 쇠말뚝을 박은 후 유곽을 끌어들이고 나중에 병참공장까지 세운다.


광복 후 바다로는 피란민을 받아들이고 육지로는 농촌의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만석동은 이제 할머니의 쪼그라든 젖가슴처럼 말라비틀어진 포구 하나를 가슴에 부여안고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만석동의 본래 태생은 바다.

현재의 만석동 대부분은 갯벌을 메워 만든 매립지다.

바다와 접한 이곳은 1900년 초 만해도 조선인 20~30가구만 사는 아주 한적한 마을이었다.

일본인 사업가 이나다(稻田)가 1906년 9월부터 주변을 메우기 시작해 약 50만㎡(15만평)의 새로운 땅을 만들었다.

그는 조선인 집들을 몰아내고 이곳에 정미소와 간장공장을 유치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립으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 했던 이나다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보게 되었다.

고심 끝에 그가 내놓은 방안은 유흥업소 유치였다.

당시 선화동에 있던 창녀촌 부도유곽을 본떠 '묘도유곽'을 만들었다.

묘도(猫島)는 만석동 앞바다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매립지에서 묘도 가는 언덕에 6, 7채의 객실과 고급 음식점 그리고 해수탕을 갖춘 2층짜리 '팔경원'을 건립하고 주위를 홍등가로 만들었다.

팔경원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구릉지에 서 보았다.

주위에 비해 살짝 높지만 시야가 트여 전망이 좋은 편이다. 그들은 그때 그곳에서 어떤 팔경(八景)을 감상했을까.

조선총독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인천에 오면 이곳 팔경원에 가끔 들렀다고 한다.

술과 여자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돈이 풀리고 사람들이 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이곳은 너무 외져서 이토의 발길도 지역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 땅의 일부는 중국인의 채소밭으로 전락하거나 대부분 오랫동안 잡초 무성한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만석동 매립지에 본격적으로 공장이 들어선 것은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라고 자랑한 이 공장은 1934년 10월 1일 종업원 3000명에 직조기 1292대로 조업을 시작했다.

하루 품삯이 쌀 2되 정도로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조선인들은 동양방적에 들어가길 원했다.

유니폼 입은 종업원들은 스스로 '동대(東大)'에 다닌다고 할 정도로 큰 자부심을 지녔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출신 영화배우 도금봉(본명 정옥순)도 이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단했제. 우리 큰 딸이 동일방직에 다녔는데 그 애 덕분에 동생들 다 공부했어. 월급날에는 이 일대가 하루 종일 들썩거릴 정도였으니까."

49년 전 전남 남원에서 올라와 만석동에 정착해 6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살고 있는 김성순(81) 할머니의 설명이다.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를 빼놓고는 만석동을 얘기할 순 없다.

이 회사는 1937년 6월 광산용 기계 생산업체로 설립되었다.

공장 터를 조성하면서 괭이부리섬 묘도를 깡그리 뭉갠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인천을 대륙병참기지로 삼는다.

1943년 4월 말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육군조병창으로부터 잠수함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잠수함을 진수시키기 위해 도크를 신축하고 1300여 명의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을 위한 숙사(宿舍) 112동을 새로 건축한다.

이때에 세워진 집들이 현재의 '아카사키촌'의 근간이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화장실도 없는 쪽방으로 집을 지었다.

골목은 딱 어른 어깨 넓이다.

60년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근로자들이 묵었던 왜색풍의 집들이 힘겨운 채 곳곳에 남아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여전히 '공동변소'를 사용한다.

잠수함 1호기는 명령받은 지 1년 만에 제작돼 진수되었다.

광복될 때까지 총 4척의 잠수함이 만석도크를 통해 태평양으로 나갔다.

광복을 맞아 진수되지 못한 두어 척의 잠수함들은 60년대 초반까지 도크에서 녹슨 고철이 돼 나뒹굴었다.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은 만석동을 '잠수함 만들던 동네'라고도 불렀다.

6·25 전쟁 후 주로 배를 타고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이 동네에 정착했다.

이어 6,70년대 산업화 시기에는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터전이 되었다.

만석동은 70년대 까지 반어반노(半魚半勞), 어부와 노동자가 반반이었던 동네였다. 주인집은 배를 부리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은 공장에 다녔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만석동에 '비치'가 있었다.

지금처럼 빡빡하게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갯벌과 모래가 뒤섞인 해변을 끼고 있었다.

그걸 추억이라도 하듯 2002년에 재개발된 고층아파트의 이름을 '만석비치타운'이라고 지었다.

만석비치타운의 자리는 원래 대성목재(조선목재공업)가 있었다.

1936년 설립된 조선목재공업은 라왕 합판 등 항공자재를 제조했던 군수공장이었다.

해방 후 대성목재로 이름을 바꿔 합판 등 건축 목재를 생산했다.

6,70년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올라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성목재 밖에 갈 곳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당시에는 규모가 아주 큰 회사였다.

이 회사는 앞바다에 저목장(貯木場)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 지름 1.5~2m, 길이 15~20m 가량의 거대한 수입 원목들을 수천 개 씩 띄워 놓았다.

이 저목장의 원목은 벌이가 없던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주민들은 끝을 납작하게 만든 '빠루'라는 도구를 이용해 원목의 껍질을 떼어내 햇빛에 말린 뒤 일반 가정집에 팔거나 자기 집 땔감으로 사용했다.

좁은 마당에는 물론 골목마다 원목 껍질을 쌓아 놓아 비좁은 골목이 더 비좁았다.

간혹 도난 사고가 발생해 이웃간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 나무껍질을 태우면 군불이 오래 가기 때문에 연료로는 최고였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어떤 이는 멀리 배를 타고 나가 원목을 실은 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떼어내기도 했다.
회사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공정상 원목 껍질은 베껴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이를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대성목재의 저목장은 이처럼 주민들이 입에 풀칠하는데 큰 보탬을 주는 장소였지만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공간이기도 했다.

여름철 아이들은 저목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띄워 놓은 통나무 위에서 묘기 부리며 뛰어 놀았다.

순간, 미끄러져 통나무 사이로 빠지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원목 아래로 떨어지면 수압 때문에 물 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고 빠져나오려 발버둥쳐도 통나무에 막혀 쉽게 나오질 못해 목숨을 잃는다.

해마다 인근 동네에서는 1, 2명의 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선생님들은 반 학생들에게 저목장에서 놀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곤 했다.

   
▲ 굴막

비록 퇴락했지만 만석동이 바다를 완전히 잃은 게 아니다.

질펀한 부두의 옛 정취는 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을 통해 사람들은 바다로 나간다.

낚시배를 타든 조개잡이배를 타든 바다로 나가려면 포구 끝에 있는 해경만석파출소에서 승선신고를 해야 한다.

만석부두에는 두 개의 포구가 있다.

파출소가 자리 잡고 있는 포구와 쌍용기초소재 공장 정문과 만석낚시점 사이로 들어가면 '짠'하고 나타나는 또 다른 포구가 있다.

공장 쪽 포구는 화장기 하나 없는 '쌩얼' 그 자체다.

그 곳에는 오랜 시간 바다를 젖줄 삼아 온 굴막이 있다.

굴막은 만석동 아낙들이 섬에 나가 굴을 캐와서 껍데기를 벗기는 '하꼬방'같은 작은 공간이다.

바닷바람, 세월 바람에 스러진 굴막들은 공장 담벼락에 기댄 채 마치 어두운 굴(窟) 속에 있는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

굴막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30여 년 전에 한 두 사람이 무거운 굴 포대를 집으로 이동하느니 포구에서 작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거적대기로 만들었고 후에 판자와 비닐을 사용해 바람을 막았다.

한창 많을 때는 만석부두 주변에 굴 캐는 사람이 300명이었던 적이 있었다. 굴 파시였다.

당시 이 포구에는 40여 개의 굴막이 늘어섰다.

굴막 하나에 두어 명씩 들어가 밤샘 작업을 했다.

"명절이나 김장철에는 주문이 많아 집에도 못 가. 백중사리 때는 굴막 앞까지 물이 찰랑 거려 오도 가도 못해. 그냥 굴막에서 촛불을 켜고 굴을 까며 밤을 지새곤 했지."

45년 전 굴막 일을 한 영배 엄마(75)의 이야기이다.

이제 만석포구의 굴막은 거의 다 무너져 내렸지만 완전히 폐쇄된 것은 아니다.

서너 채는 여전히 '영업 중'이다.

날이 차지면 굴막 몇 개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나온다.

그런데 이마저도 오래갈 것 같지 않다.

현재 화수부두-만석부두-북성포구를 잇는 포구둘레길이 입안되고 있다.

둘레길은 이 굴막 앞을 지나가게 된다.

누추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 굴막은 철거 대상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인천판유리 공장


   
▲ 인천판유리 공장

1954년 운크라(유엔한국재건기구)의 계획으로 1956년 만석동 부지 3만7000평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해 59년 9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판유리공장이 자리한 만석동은 안면도 승언리 해변 등의 밀가루 같은 보드라운 모래를 배편으로 실어오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생산량과 수입 등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되자 1981년 인천 공장의 명성은 저물어 갔고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동일방직 의무실


   
▲ 동일방직 의무실

동일방직 안에는 공장 건물과 어울리지 않은 1목조 단층 기와집이 한 채있다.

1955년에 신축된 이 건물은 한때 강당, 사내 직업훈련원, 부속 의무실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비어있다.



▲만석우체국


   
▲ 만석우체국

경인선 철로에 양쪽으로 이웃한 만석동과 송월동은 같은 생활권으로 주민들은 철도 건널목을 건너다니며 자유롭게 교통했다.

1962년 9월에 문을 연 만석우체국은 두 동네가 만나는 길목에 있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던 어부가 뭍에 나와 맨 먼저 달려온 곳도 이곳이고 한 달 봉급을 받은 공장 근로자도 먼저 발길을 돌린 곳도 이곳이다.

그러던 중 안전을 위해 철로변에 차단벽이 세워지고 그 위로 만석고가도로가 생겼다.

단절은 곧 퇴락으로 다가왔다.

발길이 끊긴 우체국은 이제 만석동과 같이 그렇게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 만석동 골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