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수동, 시간의 닻 깊게내린 무네미

화도진 강화서 캐온 돌로 구축

과거 전국 3대어장 화수부두

조선 병사들이 마셨던 쌍우물

산업선교회 민주화 불씨 키워


사람만 표정이 있는 게 아니다. 도시도 표정이 있다.

느린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세상에서 화수동은 여전히 아날로그식 표정을 짓고 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 왔다고 해서 '무네미'라고 불렸던 이곳은 한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온갖 생물로 인천에게 젖을 물렸다. 인천의 개발 청사진에서도 비껴나 있는 덕분에 어느 때 가도 냄새와 소리로 인천인의 몸속에 체화된 강렬한 추억을 이끌어내는 몇 남지 않은 곳이다.

 

   
▲ 민들레 국수집과 서영남씨(오른쪽)

화수동의 국수집 하나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화도고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민들레국수집'은 국수 맛 때문에 뜬 집이 아니다.

그곳은 주리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매일 하늘창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천상(天上)의 식탁을 차려낸다.

이 국수집은 2003년 만우절(4월1일)에 문을 열었다. '거짓말' 같이 문을 열어, '공갈'처럼 많은 사랑이 모여들어, '구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믿기지 않게' 10년을 버텨오고 있다.

이곳 주인장은 서영남 씨다. 그는 25년 동안 가톨릭 수사(修士)로 지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 수도복을 벗어 던졌다.

"이곳에서는 줄을 서지 않습니다. 무조건 가장 오래 굶은 사람이 제일 먼저 먹습니다." 노숙인이나 배고픈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줄서기 경쟁에서 밀려난 꼴찌들이다.

이곳에서나마 줄서기와 눈칫밥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서 씨의 깊은 배려가 깔려 있다.

낡은 식탁 하나로 시작한 가게는 24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최근 바로 옆에 공간 하나를 더 마련했다.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400명에서 500명 정도. 하루 짓는 쌀만 20㎏짜리 예닐곱 포대를 풀어야 한다.

'민들레국수집'에는 정작 '국수'가 없다.

초기 식단은 국수였지만, 밀가루로는 '손님'들의 허기를 달랠 수 없어 메뉴를 변경했다. 언젠가 모든 이들이 배고프지 않은 그날, 국수는 그저 간식으로 내놓을 수 있길 바라며 가게 이름도 국수집을 고수하고 있다. 이곳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집배원, 회사원, 주부 등 뜻을 함께하는 순수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한다. 식당 안 식자재 창고에는 전국 각지의 발송지가 적힌 쌀, 고추장, 채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화수동 언덕은 요새였다. 외국함대와 상선 등 이양선(異樣船)이 인천 앞바다에 자주 출몰하자 조선정부는 고종 16년(1879)에 강화도에서 캐온 돌을 이용해 화도진(花島鎭)을 구축했다.

1894년 10월 말경에 폐쇄됐고 해방 전에 인근지역이 매립되면서 터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췄다.

화도진은 지난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花島鎭圖)'를 토대로 복원됐다. 복원 공사를 할 당시 이 터에는 피난민과 도시 빈민들의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100여년 전 화도진은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바닷물이 진지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으며 제물포(현 도심지)로 통하는 한줄기 오솔길이 화도고개를 넘어갔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정문 옆에 약 20여 채의 민가가 있었으며 간혹 말을 탄 병사가 총 이나 창을 비켜들고 왕래했고 어쩌다 가마를 탄 양반들이 드나들곤 했다.

 

   
▲ 쌍우물 옆에 있는 오줌싸개 동상

화도진 옆 작은 마당에는 사람 키 높이만큼의 '한미수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미국과 수교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조약 체결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로 인해 동헌 안에 있는 조약식 재현 밀랍인형들이 머쓱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도진 언덕에 올라서면 영종도와 작약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고층 아파트와 공장들 사이로 어렴풋 바다가 보인다. 오늘도 화도진은 100년 질곡의 역사를 품은 채 앞바다에 떠있는 '이양선'들을 그렇게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화도진 뒤쪽 동네로 내려오면 쌍우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천 향토지에서 조차 이 우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화도진도에 우물 정(井)자가 표기된 정도다. 무네미의 쌍우물은 맑고 시원해서 화도진 병사들도 길어다 마셨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안타깝게도 두 개의 우물 중 건너편에 있던 우물은 민가가 생기면서 없어져 지금은 명칭만 쌍우물일 뿐이다.

"물맛은 좀 짰어. 그래도 물이 잘 나와서 만석동, 송현동에서도 물지게 지고 와서 하루 종일 줄 서서 퍼갔지."

19세 때 이 동네로 시집와서 50년 넘게 근처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가 우물의 과거를 전한다.

지금은 우물 뚜껑이 굳게 닫혀져 있고 특이하게도 우물 몸통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가끔 그 꼭지를 통해 물을 빼버릴 정도로 우물은 여전히 원기왕성하다. 매년 10월 살아있는 이 우물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쌍우물축제가 열린다.

 

   
▲ 옛'화도고개'

이제 우리는 쌍우물 바로 옆 동구 화수동 '183번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곳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산업화 시절의 노동운동과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의 불씨를 키워온 곳이다.

화수동 주변에는 동일방직,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이천전기, 한국유리 등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1961년 9월 미국 감리교의 조지 오글 목사는 화수동 183번지의 낡은 초가를 구입해 '인천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을 설립했다.

그는 추방되기 전 까지 이곳에서 한국인 목회자들과 함께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인천산선은 김근태 등 유력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화수동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산선이 있던 골목에 어슬렁거렸다.

산선의 노동자교회 자리는 이제 '일꾼교회'로 바뀌었다. 교회 현관 입구에는 70년대 까지 15평짜리 초가지붕 건물이었던 인천산선 회관의 흑백사진과 선교회를 돕던 조지 오글 목사가 미국으로 추방되는 모습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현재 이 교회는 집회 사진과 보고 문서 등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자료가 30여 박스 가량 소장하고 있다. 또한 동일방직 여공들이 피신해 있던 지하방 등 민주화 운동의 흔적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화수동을 화수동 답게 한 것은 화수부두다. 화수부두는 60~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를 비롯해 옹진, 강화, 충청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3대 어항이었다. 선박의 주소지는 덕적도, 연평도 등 섬이었지만 생선을 판매하는 곳은 화수부두였고 선주들은 인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1960년대에 이미 자가용을 부릴 정도로 자산가였다. 화수부두에는 수협공판장, 얼음공장, 어구상점, 식당 등이 즐비했고 새우젓 배들이 입항하는 날이면 큰길까지 비릿한 난장이 서곤 했다. 여름날 인근에 사는 아이들은 얼음공장에서 선박으로 나르는 공중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얼음조각을 주워 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제 화수부두는 도시의 오지(奧地)가 되었다. 문명도, 문화도, 세인의 관심도 모두 비껴 간 안쓰러운 부두가 되었다. 옛날의 화려한 모습은 오간데 없고 고달픈 삶의 흔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 공장과 북항 개발로 포구로서의 여백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출항도 가물에 콩 나듯 하는지 경찰마크 뜯긴 선박출입통제소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그림자 길어진 시간, 부두를 빠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추억이 스며있는 비린내와 뱃고동이 바람에 실려 왔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곳

 

   
▲ 대건중학교

▲대건중학교
화도진 부지일부에 1945년 9월 영화중학교 1953년 11월 영화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63년 대건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88년 중학교는 폐교되고 고등학교만 남았다. 이마저도 88년 연수구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 영풍아파트가 들어섰다.

▲서울식당
가장 인천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는 화수부두에 '서울' 간판을 단 식당이 있다. 40여년 된 서울식당은 복 잘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주인장 안문숙 할머니(85)가 직접 담아 온 장으로 복탕을 만든다. 복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살아있는 것을 직송해 온다. 구석진 곳에 허름하게 자리 잡았지만 인천에 새로 부임하는 고위 공직자나 유명 탤런트들이 많이 찾는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 부립목욕탕

▲인천부립공중욕장(부영탕)
우리나라에 대중욕탕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24년 평양에서다. 인천에서는 1932년 신화수리(화수동)에 148.8㎡의 규모로 부립(府立) 공중욕장이 설립되었다. 욕탕은 폐쇄되었고 그 자리에 화도교회선교원이 들어섰다.

▲이즉 묘
화수동에는 고성 이씨, 소성 이씨가 여러 대에 걸쳐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지금의 화수2동 일대에는 조선 인조 때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의 선조인 이즉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인조는 이곳에 있던 이즉의 묘를 모두 파내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관원들이 묘를 찾으러 왔을 때 짙은 안개가 껴 찾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이곳이 명당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