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송림동, 시간이 멈춘 黑白사진 그속에 우리가 있다
   
▲ 지금은 사라진 부처산 아랫동네. 이곳에 동산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섰다.


전동서 일본군에 쫓겨난 사람들과
황해·충청·전라도 이주민 한 곳에
산 모양 그대로 집 지어 동네 형성
 
2층짜리 '현대극장' 지역 랜드마크
이기동·배삼룡쇼 있는 날 인산인해


송림동의 산들은 100년 넘게 사람을 안고 살았다.

이발관, 한약방, 목욕탕, 솜틀집, 국수집….

그 산을 터전 삼아 살던 사람들의 삶의 오랜 공간들이다.

둥지를 틀고 한 자리에서 4, 50년은 기본.

아직도 그곳에 남아 엄연한 현재의 사진첩을 구성하는 소재들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내쉰 숨이 만들어낸 기억과 시간이 훑고 간 삶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비규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성냥개비로 지은 것처럼 집들이 산산조각 파편 되어 흩어졌고 거대한 흙더미 속에 묻혀 버렸다.

외할머니 댁에 놀러온 어린 남매, 새벽에 가게 일을 하고 잠시 집에 들른 주부, 폭우가 쏟아져 날품 팔 일 없어 집에 있던 가장 등 26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1990년 9월11일 낮 12시40분, 동구 송림5동 박문여고와 선인중학교 사이 흔히 '부처산'이라고 부르는 야산 축대가 무너지면서 수백 톤의 흙더미가 21 가구가 모여 살고있던 가옥 12채를 덮쳤다.

이 산은 돌부처 88개가 똬리를 틀고 있던 일본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산등성이 부처형상이라 하여 '부처산' 혹은 '부채산'이라고 불리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부처님의 자비는 없었다.

 

   
▲ 1998년 문을 닫은 현대극장.


동구 송림동의 산들은 이렇게 늘 위태로웠다.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도 늘 위태로웠다.

1900년대 초 일본군이 중구 전동 부근에 주둔하면서 그곳에서 쫓겨 온 사람들이 송림동 이쪽저쪽 산등성이에 움막을 지었다.

이어 6·25 전쟁이 터지자 황해도 등 이북 사람들이 산비탈에 솥단지를 걸었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공장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식솔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불꽃을 피어낸 장본인들이다.

송림동의 산들은 그렇게 100년 넘게 사람을 품고 살았다.

애초 빈 땅에 말뚝 박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동네는 산 모양대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남의 집 마루와 안방을 지나야 내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사람이 죽어도 관 하나조차 돌릴 수 없는 좁은 골목이 생겨 났다.

등 굽은 골목들은 마치 쟁기질한 것처럼 길게 산 밑으로 구불구불 내려갔다.

산 아래에는 송림로터리, 현대극장, 현대예식장, 동부시장, 노동회관 등 도시 기능의 요소를 두루 갖춘 '안 송림동'이 있다.

이곳이 송림동의 안쪽이요 그 밖은 송림동의 바깥이다.

6, 70년대 송림동은 실제로 인천 도심의 끝이었으며 검단, 개건너 등 교외에서 들어오는 첫 동네였다.

그 시절 '안 송림'은 일종의 다운타운이었다.

안 송림은 지대가 낮다.

동네 옆으로 바다와 통하는 갯골이 굽이 흘렀다.

주변은 온통 미나리꽝 아니면 배추밭이었다.

낮은 곳을 북돋워 평지를 만들었지만 비만 오면 물이 고였고 사리 때는 바닷물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1965년도에 개교한 서흥초교 학생들은 한동안 등교할 때마다 다 탄 하얀 연탄을 들고 와 운동장에 던지는 게 일상이었다.

이 벌판에 곡마단 천막이 쳐지고 원숭이를 앞세운 약장수들이 모이면서 동네는 점차 활기를 얻었다.

1960년대 초 큰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1650㎡평 규모의 2층짜리 현대극장이다.

도심이 아닌 변두리에 극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내 영화관에서 몇 달 전에 내린 영화 두 편을 동시상영 했다.

한국인이 만든 '중국'영화와 스토리 엉성한 애로영화가 주로 올려졌다.

그나마 비가 줄줄 새는 필름은 끊어 먹기 일쑤였다.

영화 대신 땅딸이 이기동, 비실이 배삼룡이 쇼를 하는 날이면 극장 앞길은 인산인해였다.

이 극장은 1998년 2월에 문을 닫았다.

현대극장은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이 일대는 송림동이란 명칭보다 '현대극장 동네'로 통했다.

주변의 상가나 가게들은 '현대'라는 상호를 붙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근의 대한중공업도 1978년 현대그룹에 넘어가면서 '현대'제철이 되었다.
 

   
▲ 1971년 완공된 2층짜리'주상복합'현대상가.



현대극장 바로 옆에는 아주 독특한 2층짜리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가운데 통로에 회랑이 길게 놓여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좁은 골목이 격자형으로 뻗어있다.

각 동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으며 한 낮인데도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백열등이 켜져 있다.

그만큼 어둠침침하다.

이 건물의 이름은 '현대상가'.

아래층은 가게, 위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이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 터는 인근에서 키운 채소를 내다 팔던 노점들의 차지였다.

1970년 상가 건립을 추진하면서 노점상들을 길 건너 시장 깡마당 빈터로 강제 이주시켰다.

1971년 4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현대식으로 지은 상가가 완공되었고 13평 점포당 350만원에 분양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에 맘먹는 액수다.

그즈음 건너편으로 쫓겨난 노점상들은 결속을 다지며 상권을 형성해 그해 12월24일에 동부시장을 설립한다.

이후 원예협동조합공판장, 동구상가,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등을 '현대시장'이란 이름으로 한데 아우르며 한때 인천 최대의 시장으로 발전한다.

반면에 현대상가는 몇몇 포목점만이 들어와 장사를 했을 뿐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상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1층 가게를 값싼 살림집으로 세를 놓으면서 점차 슬럼화 되기 시작했다.

두 시장의 신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현대상가는 지금 경쟁에서 밀려난 채 초췌하고 늙수그레한 모습으로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현대극장 못지않게 유명한 건물이 노동회관이었다.

한국노총 인천지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실제는 지역 복지회관의 성격이 강했다.

제삼교회 바로 앞에 터를 잡은 3층 건물에는 목욕탕, 이발소, 미용실, 예식장, 식당 등이 들어섰다.

특히 지역민에게 인기 있었던 시설은 목욕탕과 이발소였다.

다른 이발소가 200원 할 때 회관 구내이발소는 30원이었다.

이발료가 싸다보니 문을 열기도 전에 줄을 서 기다리곤 했다.

"영등포, 수원 등에서 날 잡아서 기차타고 온 가족이 머리를 자르러 왔어요. 심지어 딸들도 데리고 와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이발한 후 목욕하고 자장면 한 그릇 먹고도 돈이 남거든. 한창 때는 이발사만 15명을 두고 일했어요."

2000년 그 자리에 동구청소년수련관이 건립되기 전, 끝까지 노동회관에 남았던 구내이발관 이송철(73) 사장의 설명이다.

한국노총이 떠나면서 회관이 폐쇄되자 그는 바로 옆에 '회관이발관'을 열고 지금까지 가위를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부터 37세의 아들이 그 자리에서 가위손의 대를 잇고 있다.

 

   
▲ 일명'똥고개'라 불리던 송림·송현동 고개.


지금의 송림동 이마트 자리는 매립하기 전에 바다였다.

'똥차'들이 이곳에다 분뇨를 버렸다.

바로 옆 염전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은 변소에 빠진 동전을 줍기 위해 똥차를 따라 다녔다.

실제로 똥차는 가끔 동전을 흘리고 다녔다.

송림동이 인분과 맺은 인연은 오래 갔다.

1977년 똥고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송림6동 옛 대주중공업 뒤편, 현 백병원 부근에 송림위생처리장이 설립되었다.

이전에 숭의동과 연희동 등에서 처리되었던 인천 전역의 분뇨가 3만㎡ 규모의 이 '똥공장'에서 처리되었다.

여름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역한 냄새에 주민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는 밥 먹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었어요. 위생처리장이 가동을 멈춰야만 그때 숟가락을 들었을 정도였어요. 어휴, 냄새 대단했지…."

송림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윤배(56) 씨는 불현듯 기억 속의 냄새를 맡았는지 미간이 살짝 접혔다.

이 처리장은 1996년 9월에 폐쇄되었다.

이 부지는 2014아시아경기대회 배구장으로 재탄생했다.

똥공장 자리에 세워진 배구장 이야기는 송림동의 극적인 발자취 그리고 변신의 하이라이트이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인천도축장


▲인천도축장

현 동구청 자리는 인천보건조합이 운영했던 도축장이었다.

1933년판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도축장은 1916년 9월6일에 허가를 받은 후 연 평균 6000여 마리의 소와 돼지를 도살했다.

1968년 이곳에 동구청사가 들어오는데 초창기에는 도축장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현재 구청 마당에는 도축장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는 비석이 세워져있다.

 

   
▲ 송림리 수켓장


▲송림리 수켓장

1925년 제1회 전(全)인천빙상경기 등 인천의 빙상대회는 한적한 교외였던 송림리 옛 현대극장 부근에서 개최되었다.

정식 빙상경기장이라기보다 공터에 물을 채워 얼린 경기장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스케이트를 '수켓'이라고 표기했고 경기장을 '수켓장'이라고 불렀다.

1930년대 이후부터는 각종 스케이트 경기를 숭의운동장에 물을 얼려 빙상장으로 만들어 치렀다.

 

   
▲ 노다 장유공장


▲노다 장유공장

1905년 송림리에 일본장유주식회사 인천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1917년 노다장유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고 일본간장과 된장을 대량으로 생산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과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판매했다.

당시 인천은 간장과 된장의 주 원료인 대두를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50년 이 공장 터에 인천동부경찰서가 들어섰고 현재는 인천경찰기동대가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