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현동, 산 비탈길처럼 그들의 삶도 비탈졌다
   
▲ 수도국산과 수문통시장.


이제 골목은 추억을 지나 '역사'로 가고 있다. 골목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로 한 지역의 문화와 역사의 첫 줄이 된다. 골목은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아주 오래된 역사부터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든 걸 들려준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던 옛날이야기 같이 달콤하며 때론 인생의 교훈과 지혜를 주는 잠언(箴言)처럼 묵직하다.
인천의 골목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깊게 패인 도시의 잔주름이다. 한 도시가 어떤 주름살과 어떤 피부, 어떤 눈빛을 갖게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도시의 모습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닮기 때문이다. 인천 골목만큼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는 도시도 드물다. 인천일보가 월간 <굿모닝인천> 유동현 편집장과 함께 수문통에서 백마장까지, 인천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골목 속으로 매주 한 차례씩 깊숙이 들어가 본다.
 

   
▲ 해방우물.


동구 송현동 사람들은 6·25 전쟁 난민(亂民) 아니면 산업화 시대 빈민(貧民) 사이의 삶을 오랫동안 이어갔다. 그 구차한 삶을 처절하게 지탱시켜준 것은 수도국산이었다. 수도국산은 그들에게 어머니 품이었다. 산이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숨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송현동 사람들은 하루의 고단한 등짐을 내려놓고 밤새 그곳에 기대어 있다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고갯길을 내려가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으로 향했다.
수도국산은 근 100년 가까이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구역이었다. 배수지 바깥으로 철조망이 높게 둘러 처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24시간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경계가 철저한 것은 배수지가 국가 주요시설로서 만약에 간첩이 물탱크에 독약을 타면 인천시민의 절반이 죽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함부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잡히면 '간첩' 죄로 감옥에 갈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높고 촘촘한 철조망일지라도 아이들의 몸을 막진 못했다. 숲이 우거진 배수지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철조망을 뚫은 아이들은 나무총이나 칼을 들고 편을 나눠 총싸움을 했다. '밀림' 속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배고프면 아카시아를 따서 씹어 먹었다. 간혹 여자애들도 곤충·식물채집을 하기 위해 개구멍을 드나들었다. 아예 수도국산에 맞닿은 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제집 드나들 듯했다. 몰래 그곳에서 봄나물을 채취하거나 겨울 땔감 잡목을 긁어모았다.

거대한 판잣집 동네는 이 산을 중심으로 해서 둥그렇게 형성됐다.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 포개 놓은 듯 산 밑에서 꼭대기까지 한뼘의 여유 공간도 없이 앞 집 어깨를 타고 올라섰다. 틈만 보이면 무단으로 밤새 집을 지었다. 이 때문에 남의 집 마루를 통과해야만 내 집 마당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도 생겼다.
18만㎡에 1800채의 꼬방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안방, 건넛방, 마루 할 것 없이 창문을 열면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동네. 서울의 난곡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달동네 수도국산은 1998년부터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에 들어갔고 송현동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터전을 내주고 밀려나갔다. 그 자리에 3000가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솔빛마을이 들어섰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의 애환이 담긴 살림살이들은 2005년에 개관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남겨져 있다. 동네가 철거될 때 전국의 고물상이 다 모여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해 갔다.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사용된 고고한 유물이 아닌 우리 부모들이 사용했던 세간들이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채 박물관으로 들어가 추억을 전시하고 있다.

수도국산과 이어진 작은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그냥 '돌산'이라고 불렀다. 이 산 아래쪽에는 피난민 수용촌이 있었다. 6·25전쟁 때 황해도 등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합판, 천막 등을 주워서 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난민촌을 형성했다.
1980년대 초 이 돌산 동네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재개발 됐다. 이 대목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얽힌 이야기가 하나 등장한다. 취임 후 전 대통령은 산업시설 시찰로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을 택했다. 시찰단 일행은 먼저 인근의 수용소촌과 송현3동사무소를 들렀다. 이어 돌산 밑의 길로 해서 인천제철 쪽을 가다가 산동네를 보고 깜작 놀랐다. '아니 인천에 아직 저런 동네가 있다니….' 이 길은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귀빈들의 산업시찰 루트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철거 지시가 바로 떨어졌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1982년 불량주택 531채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10평에서 20평짜리의 5층 공영아파트송현라이프주택단지가 들어섰다.
 

   
▲ 순대 골목.


송현동에는 바다를 끼고 중후장대한 공장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제철이다. 1941년에 설립돼 요철을 생산한 조선이연금속은 해방 후 대한중공업으로 재가동됐고 인천제철로 이어졌다. 이후 인천제철은 1978년 4월 현대그룹으로 흡수되면서 '현대제철'로 그 이름이 바뀐다. 이 때 '경영인' 이명박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해 6월 현대제철 사장으로 이명박이 취임한다. 그는 1981년까지 약 3년 동안 현대제철 사장직을 맡는다. 1991년 경 정주영 회장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즈음 이명박 사장은 정 회장에게 현대제철을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고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예전에 송현동 일대는 제철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대낮에도 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거나 시비를 걸기 보다는 산업화 시대의 자랑거리로 삼던 시절이었다. 송현동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철가루를 들이마셔 '일찍 철든다'는 자조적인 말만 오갔을 뿐이다.
당시 전국의 고물은 제철과 제강 공장이 있는 송현동으로 실려 왔다. 쇳덩이는 곧 돈이었다. 고물을 잔뜩 실은 트럭은 동네 청년들의 표적이 됐다. 그들은 화수동 쪽에서 오는 트럭이 수문통 다리를 지나기위해 속도를 줄이면 재빨리 트럭에 올라타 돈이 될만한 쇳덩이를 갯골로 던져 버렸다. 물이 빠지면 '전리품'을 주워서 고물상에 팔았다. 그 시절 유난히 송현동에는 고물상이 많았다.

현재의 화평치안센터와 송현치안센터 사이, 약 200m 거리에는 '수문통'이라 불린 갯골 수로가 있었다. 지대가 낮아 인근 동네의 온갖 생활하수가 이곳으로 다 흘러들었다. 이곳에 종종 탯줄이나 사산아(死産兒)를 싼 시멘트 봉지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똥바다'였다.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밀물은 수문통을 정화시켰다. 썰물로 나갈 때 온갖 쓰레기는 수로를 따라 바다로 떠내려갔다. 물때 따라 작은 돛단배가 수문통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뭣 모르고 고깃배를 쫓아온 갈매기가 이곳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배짱 좋은 아이들은 수문통 갯골에서 멱을 감기도 했다.
화평동 쪽 수문통 끝자락에는 한동안 '수상가옥'이 있었다. 갯골을 일부 복개하고 그 위에 많은 판잣집들이 들어섰다. 안방 밑으로 바닷물이 찰랑 거렸다. 우리나라 유일의 수상가옥이었던 셈이다. 이 위에 1962년 9월1일 수문통시장이 개장했다. 슬레이트 지붕에 판자벽을 한 이 시장의 건물은 1층은 가게이고 이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이었다.
시장으로 시작했지만 화평동 쪽 입구에 순대집과 그 반대편 입구에 과일가게 몇 집만 장사를 하는 등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결국 대부분 주거지로 사용됐는데 대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아 통로는 늘 어둠침침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누우면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1996년 수문통의 나머지 부분이 복개됐고 수상가옥은 완전히 철거됐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 수도국산 박물관.


<그때, 이 곳>
▲해방우물
수도국산 주변에는 우물들이 많았다. 그 중 송현시장에서 수도국산 오르는 골목에 있는 해방우물이 유명했다. 흔히 층층대 우물이라고도 불렀다. 몇 년 전까지도 이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메워버렸다. 우물을 개통할 때 세운 작은 기념석이 한 켠에 세워져 있다.

▲미림극장
1957년 11월 고희석 대표가 송현동 중앙시장 진입로에 천막극장을 세워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하면서 시작됐다. 영화 뿐만 아니라 남진과 나훈아 등의 리사이틀 무대이기도 했다. 지난 2004년 7월29일 영화 '투가이즈'를 끝으로 문을 닫은 미림은 지난해 10월2일 250석 규모의 '실버전용극장'으로 리모델링해 다시 개관했다.

▲순대골목
동인천북광장 옆에 순대골목이 있다. 이 순대골목의 뿌리는 30여 전의 수문통 시장이다. 당시 화수부두, 만석부두와 가까운 수문통 주변에는 항만이나 공장 노무자들이 즐겨 먹던 순대국밥집이 시장통 안에 많이 있었다. 수문통 시장이 헐리면서 국밥집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고 기존에 있던 몇몇 국밥집들과 합쳐지면서 순대골목이 된 것이다. 숭의동에서 이화순대와 함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시정순대도 여기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