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24
임오년 인천부사 자결과 갑오년 감리서 습격사건
   
▲ 1894년 무렵의 인천감리서.


1883년 인천부(仁川府) 다소면(多所面) 해안지대인 제물량(濟物梁) 일대에 외국인 조계지역이 설정되면서 근대도시 인천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천관아가 위치한 읍내와는 상당한 거리를 둔 제물포 해안가에 외세에 의해 근대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전통적으로 인천의 중심인 '원인천' 지역인 문학산 일대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제물포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근대도시 인천, 즉 '새인천'이 탄생하고 이곳을 무대로 한국 근대화의 격동이 펼쳐졌던 것이다.

'원인천'에서 근대도시 제물포에 마련된 '새인천'으로 역사의 물굽이가 흘러가는 과정은 물론 순탄하지 않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주목된다.

하나는 1882년 임오년에 일어난 '인천부사 정지용의 자결'이고, 다른 하나는 1894년 갑오년에 발생한 인천부 직원들의 '인천감리서 습격사건'이다.

일찍이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이 '인천지지'에 기록한 사건이다.

이들 사건에 대한 실증적 복원과 깊이 있는 연구가 뒤따르기를 고대하며, 이훈익 선생 기록에 의지해 간략히 소개한다.(이훈익, '인천지지', 대한노인회 인천직할시연합회, 1987 참조)

1882년 임오군란을 피해 인천에 내려온 하나부사(花房) 일본공사 일행 28명은 군란 정황을 모르는 인천부사 정지용(鄭志鎔)을 속이고 후대를 받으며 인천관아 정당(政堂)과 객관(客館)에서 피신했다.

그런데 그들을 뒤쫓은 군란 주동자에 의해 대원군의 비밀지령이 전해지자 평소 일본에 적개심을 품고 있던 인천부 병사와 부민들이 관아를 습격했다.

하나부사 일행은 6명의 피살자와 5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가까스로 월미도로 피란을 했다.

이 일로 인천부민들은 부사 정지용을 비난하고, 한성좌윤으로 전근을 당한 정지용은 이를 참지 못해 끝내 자결하고 말았다.(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인들이 정지용 공을 기린다고 해서 관교동 인천부청 앞에 위령비를 세웠다고 하나, 8·15해방 후 인천시민들이 그 비석을 때려 부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제물포가 개항되고 나서도 외재적 근대화로 인한 분란은 끊이지 않았다.

인천이 개항된 지 10여 년 지난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인천감리서 습격사건이 대표적이다.

감리서는 개항장에 설치해 대외통상관계 업무를 처리하던 기관이다.

1883년 9월 부산·원산·인천 등 세 곳에 처음 설치됐다.

초기에는 해당지역 부사가 감리를 겸임하면서 기존 행정체계 안에서 업무를 처리했으나 개항장 사무가 증가하면서 1892년에 이르러서는 직원을 따로 파견해 독립된 관서로서 기능하게 됐다.

그 소관업무는 대체로 외국영사와의 교섭, 조계 안 사무, 개항장 상품수출입과 세액을 결정하고 그 세금을 거두어 탁지부와 외부에 보고하는 관세업무, 거류지 내 외국인과 왕래하는 조선상인 보호, 개항장 상업·치안질서 유지 등 개항장 내 모든 사무를 전담했다.

개항장 인천에 정식으로 감리가 임명된 때는 1883년 9월19일이다.

부산·원산과 함께 인천에도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조병직(趙秉稷)이 임명됐다.

그런데 감리서 설치 초기에는 그 조직이 매끄럽지 못해 일반행정을 담당하는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부의 직원과 통상사무를 담당하는 감리서 직원 사이에 업무권한을 둘러싼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던 와중에 1894년 6월14일 인천부 관리가 인천항 고용원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급기야 이 일은 쌍방 간 큰 싸움으로 번졌다.

격분한 인천부 관리들은 일반 백성들을 선동해 인천항 감리서를 습격, 사무실을 부수고 감리서 소속 고용원들을 구타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무려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부사 겸 감리 성기운(成岐運)은 파면됐다.

'원인천'의 인천부 관아와 '새인천'의 감리서가 충돌한 이 사건은 전통적 행정기구와 개항장의 근대적 행정사무가 미분화한 상태에서 기능이 서로 중첩되면서 발생했다.

그러나 인천항에서 외세에 의해 급격하게 추진된 근대화가 얼마나 비주체적이고 형식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조선의 국제항으로 건설된 근대도시 인천에서 외세 발호 앞에 일선 행정조직마저 이처럼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으니, 조선의 미래는 곧 바람 앞 등불이었던 것이다.

이런 혼란을 바로잡고자 동학농민들이 보국안민의 횃불을 높이 들었으나 청일 양국군대의 인천상륙과 내정간섭에 이은 청일전쟁 발발로 무위로 돌아가고, 친일파 정권에 의한 형식적 근대개혁인 갑오경장에 그치고 말았다.

이 흐름 가운데서도 개항장 인천에서는 새로운 근대의 민족운동이 주체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했으니 다음 편에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