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21
박 대통령 통행료 폐지·지하화 공약이행 시급
   
▲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한 용현동 시외버스터미널.


1968년 12월2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을 기점으로 인천 남구 용현동까지 연결된 이 도로는 1967년 착공해 1968년 1년여 만에 개통됐다.

처음 개통된 구간은 가좌동까지였다.

1969년 7월21일에 용현동까지 개통됨으로써 총연장 29.984㎞가 완공됐다.

인천항을 통해 급증하는 수출입 화물량 수송수요에 대비해 경제개발계획 5개년계획에 따라 건설된 이 도로는 길이는 비록 짧지만 수도 서울과 임해 항구도시를 잇는 첫 고속도로다.

이후 전개될 고속도로시대와 고도성장시대를 맞는 계기를 마련했다.(이하 경인고속도로에 대한 주요 내용은 김홍전, '경제 전문기자가 본 인천경제사', 인천일보사, 2006 참조)

우리나라가 고속도로 건설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1958년 일본에서 나고야고속도로가 착공된 직후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열악한 재정사정 등으로 인해 건설부 등 정부 일부 부처와 건설 전문가들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독을 공식 방문하면서 독일의 아우토반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한 후 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다고 한다.

1965년 9월 한국정부의 용역을 받아 작성된 세계은행 보고서는 당시 한국의 도로사정에 대해 "과거 12년간 노력에도 한국의 도로망 상태는 대단히 나쁘다.

(···) 한국의 도로를 조사할 때 1946년 이전에는 한국에서 현대적 도로가 구상된 적이 없고 따라서 한국은 도로 사업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1967년 4월에 경인·경부 등 4개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담긴 대국토건설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건설구상이 발표되자 세계은행조차 건설비와 관리비 때문에 경제파탄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국가 경제력의 70% 이상이 집중돼 있는 수도권의 관문 인천항의 경우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용물동량이 폭주했으나, 배후 소송망이 부실했던 탓에 교통체증이 날로 악화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거센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경인·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속도로를 순수하게 국내 자본과 기술만으로 건설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해 무모한 도박이라는 비난도 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67년 5월1일 경인고속도로 기공식을 갖고 총연장 32㎞, 노폭 31m 6차선의 경인고속도로를 1969년 말 준공한다는 목표로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준공시점을 1년 앞당기면서 건설규모도 4차선 20.4m로 축소 조정했다.

고속도로 건설이 그만큼 급했던 것이다.

도로 건설공사는 초기에는 순조롭지 못했다.

자금보다도 중장비 확보가 난제였다.

중장비도 풍부하지 못했을 뿐더러 대부분 노후된 장비였고, 게다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가 동시에 시행된 탓에 장비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이에 비상조치로 외국으로부터 중장비를 긴급 수입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1차 계획구간인 영등포-부평 간 23.5㎞가 1968년 12월21일 우선 개통됐다.

부평-가좌동 교차로 간 연악기반 6㎞는 1969년 7월21일 끝났다.

인천시내를 관통하는 2차 계획구간인 가좌동 교차로에서 인천항 제2도크까지 구간은 더 늦어져 1973 4월19일 완공됐다.

경인도로가 개통되자 서울-인천 간 소요시간이 개통 당시 1시간에서 18분으로 단축돼 서울과 인천이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했다.

1974년 5월에 인천항 제2선거(第二船渠)를 완공한 뒤에는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됐다.

경인고속도로가 완공되자 1970년 2월23일 동인천부터 서울역까지 경인고속도로를 운행하는 삼화고속버스가 영업을 개시했다.

경인고속도로 종점인 용현동 614번지에 대지 5000평, 연건평 1200여 평 지하1층 지상5층의 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선 것도 그 무렵이다.

갖은 난관을 뚫고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는 1970년 7월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우리 기술로 초단기간 내에 건설했다는 점에서 당시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박정희 정권의 성장개발주의가 상징하는 사회기반시설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경인고속도로 건설효과는 채 20년도 가지 않았다.

'마이카' 시대를 지나 1990년대 들어 자동차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교통체증이 연일 지속됐고 제2, 3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한 이후인 오늘날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경인고속도로가 완공된 지도 벌써 45년이다.

지난 세월인천시민들은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도 서울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 통행료를 지불해왔다.

도심을 가로지는 경인고속도로는 인천의 도시환경을 저해하는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천시민 숙원인 경인고속도로 통행료 폐지와 지하화를 공약했다고 하니, 내년에는 해결의 가닥이 잡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