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수처작주'(隨處作主)란 고사성어를 언급하며"어느 곳에 있든지 주인의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해문화·재단행사 결실 … 신중함·추진력 성공비결

굴업도 핵폐기장·인천대교 지역현안 해결에도 앞장서

"가장 어려운 점 문화활동""정치적 시선으로 보는 것"




새얼아침대화 330회, 가곡과 아리아의 밤 30주년, <황해문화> 발간 20주년, 전국학생어머니백일장 28주년…. 2013년 돌아본 새얼문화재단의 여정은 짧지 않아 보였다.

2,30년이라는 세월동안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황소처럼 뚜벅 뚜벅 걸어온 것이다. 지용택(77)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지금까지 잘 올 수 있었던 것은 인천시민들과 새얼 회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천시민들이 올곶게 지속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에 지금의 새얼문화재단이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재단의 활동을 '새얼문화운동'이라고 말한다.

지난 1975년 새얼문화재단이 설립된 지 38년에 즈음해 지 이사장으로부터 새얼문화운동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를 들어봤다.

"설립 당시 캐치 프레이즈가 '우공이산'이었어요. 이후 '해불양수'가 동참했고 '좋은 사람이 살아야 좋은 도시가 된다'를 거쳐 지금은 '사람이 곧 문화다'의 단계로 접어들었지요."

지난 1975년, '어리석은 영감이 마침내 산을 옮긴다'는 뜻의 우공이산을 주창하며 새얼문화운동은 시작됐다. 그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게 인천서 되겠느냐, 안 될거다"라고 말했지만 지 이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한 장 씩의 벽돌을 쌓아나갔다. 설립 2, 3년 전부터 사람들을 만나며 준비해온 그로서는 사람들의 걱정이 '기우'로 들렸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현실이 됐다.

"무엇이든지 조심스럽게 시작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후퇴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지요."

새얼문화재단이 한 번 시작한 행사는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 온 비결에 대해 지 이사장은 신중함과 추진력을 꼽는다. 그래서인지 새얼의 행사는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룬다.

"30년이 되도록 제가 가곡과 아리아의 밤을 앉아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손님들도 서서 보는데 제가 어떻게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새얼아침대화 역시 서서 듣는 사람이 많으며, 전국학생어머니백일장은 매년 6000여명 이상이 참여, 행사장이 사람의 물결로 넘쳐난다.

<황해문화>는 지역적이면서 전국적 이슈를 다루며 막강한 유가부수를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결실의 뒤에는 지 이사장을 비롯해 새얼문화재단 직원들의 열정과 꿈이 서 있다. 그 곁엔 고뇌도 함께 묻어있다.

"문화운동을 하면서 왜 고단한 적이 없었겠어요? 그렇지만 절대 표현은 안 했지요. 가장 어려운 점은 저희 새얼문화운동을 정치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지요. 물론 정계입문에 대한 제안을 받아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사람들이 지 이사장을 두고 '정치적 야심'이 있다고 수군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거나 설득을 통해 "자신은 순수한 문화운동가로 남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간과 함께 해결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제가 정계에 입문했다면 어떤 활동을 했을 지는 모르지만, 아마 새얼은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이런 운동은 개인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며 운동가의 자만과 착각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옳지 않은 일에는 똑바로 맞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 이사장이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때 김병상 신부와 함께 맨 앞에 섰던 것이나, 인천대교 주경간폭 문제 때 새벽같이 일어나 여기저기 다닌 것이나 모두 어려울 때는 직접 나서는 그의 신념으로 가능했다. 결국 굴업도 핵폐기장 사업은 철회됐고, 인천대교 주경간폭은 800m로 변경됐다. 인천대교 주경간폭 문제는 정부에서 예산을 확정해 그냥 집행할 수 있었던 사업이었다. 확정된 기재부 예산집행을 중지하고 변경한 것은 해방 이후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같은 그의 행동은 '지역 어른' '지역의 선배' 로서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함이다.

"앞으로도 지역의 현안이 있는데 젊은 후배들의 힘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제가 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행동하는 양심'은 주인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당나라때 스님인 임제의현(臨濟義玄)은 수처작주(隨處作主)란 말을 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주인이 돼라, 그것이 내가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라는 뜻이지요."

지 이사장은 '인천사람'을 강조하지만 그 인천사람은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천에서 사는 사람이 바로 인천사람이라는 것이다.

"인천 아닌 외지에서 태어났어도 인천에서 살면 인천사람입니다. 또 인천사람이 돼야 마땅합니다. 반대로 인천에서 났어도 부안이나 광주에서 살고 있다면 부안사람이나 광주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발 딛고 사는 곳이 고향이 돼야 한다"며 주인의식을 재차 강조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주인의식과 함께 가슴에 꿈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우선 저마다의 꿈을 안고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이들이었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노력으로 꿈을 실현하길 바랍니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성급해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실패는 해도 포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 이사장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에겐 꿈의 결실이 기다리지만 남에게 의존하는 사람은 금세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며 "꿈과 열정, 노력으로 젊음을 불사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세상에 지장보살이 왔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지금 세상이 많이 힘들고 어지럽잖아요. 이를 해결해야 할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지장보살 같은 사람이 한 명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지장보살은 지옥에 내려가 사람들을 구한 뒤 부처가 되겠다는 보살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입니까?"

말할 때마다 인자한 표정으로 "허, 허, 허" 웃는 그의 표정에서 지장보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