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 최고 역세권 인현동과 동인천역으로 '창씨개명' 당한 축현역
경인철도 최고 역세권 인현동과 동인천역으로 '창씨개명' 당한 축현역
  • 이원규
  • 승인 2013.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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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7
   
▲ 1920년대 축현역의 모습.


중구 인현동(仁峴洞)도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1899년 경인철도가 생긴 이후 각광을 받기 시작해서 거의 한 세기 동안 인천 최고 역세권을 형성했던 곳이다.

필자 선친은 1993년 펴낸 '인천지명고' 권말에 '인천 구시내 동명변천 일람'이라는 표를 붙이셨는데, 그걸 보면 인천의 모든 동네 지명의 통시적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오늘날 인현동에는 일제가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하고 선창리를 분할할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인가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근처에 용리(龍里. 현재의 용동)와 외리(外里. 지금의 경동)가 있어서 거기 포함시켜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강제합방 전후 용강정(龍岡町)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일본어 발음은 '다츠오카쵸'다.

1909년 '주일공사관기록'에 '인천부 경성통 용강정'이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앞서 경동편 연재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성통은 지금의 경동을 말한다.

일본인들은 자기네가 만든, 경성으로 가는 길이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외리 큰길을 경성통이라고 붙였는데 그 거리와 연결해 불렀던 것이다.

경성이라는 지명도 일본식이다.

대한제국 수도의 공식 지명은 한성이었다.

일제는 합방 전 이미 서울과 인천의 지명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일제는 합병 후인 1912년 5월 정식 법정동이자 행정동을 용강정이라고 공식화했다.

대구에서는 남용강정과 북용강정이 명명됐고 다른 도시에는 없다.

서울 용강정(龍江町)은 한자가 다르고 마포의 한강을 옛날부터 '용강'이라 불렀으니 일본식으로 정(町)을 붙였을 뿐이다.

인천의 용강정은 일본의 왕 이름이나 군함 이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장군 이름을 딴 것이 아니다.

도쿄 혼고구(本鄕區)에 동명의 정이 있다.

인천지명 담당 일본인 관리가 그곳 출신이거나 지금의 인현동 일대가 그곳과 유사해 붙인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용강정 지명을 버리게 됐다.

'인천에 고개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1950년 인현동과 전동을 합해 행정동을 인현동이라 했고 1998년에는 내경동과 다시 합쳐 동인천동이라고 했다.

앞의 글에서 쓴 것처럼 인현동도 유래가 짧고 동인천역 이름도 방위상 어색한 지명이니 가장 유서가 깊은 전동으로 했어야 한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1899년 경인철 개통 당시에는 지금의 원예농협 앞에 축현역이 들어앉았다.

축현((杻峴)은 싸리재의 한자 지명이다.

근처에서 저명한 지형지물이 한성으로 가는 고갯길 싸리재여서 축현역으로 정했다.

그러나 탑승자와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비좁아지자 지금의 역자리로 1908년 옮겨 갔다.

자료사진을 보면 그때 노선을 오른쪽으로 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26년 축현역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어 시민을 대상으로 역명 공모를 했는데 상인천역과 동인천역이 1,2위였다.

상인천역은 종착점인 인천역과 인천부청 위쪽이어서, 동인천역은 동쪽이어서 떠오른 것이었다.

결국 상인천역으로 바꾸었는데 8·15 광복 후 일인들이 지은 역 이름이 싫다고 해서 다시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다시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자 20년 전 고려했던 동인천역을 생각해 앞날의 도시 팽창을 내다보지 못하고 냅다 동인천역이라고 붙여버린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동인천역은 전혀 동인천이 아닌 지역에 있다.

상인천역이라는 역명을 그대로 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상인천역이라는 역명 때문에 이미 그 일대는 상인천 지역으로 불렸고 1960년대 초반 인천고와 인천여고에 병설된 상인천중과 상인천여중도 그런 교명을 붙였다.

인천이 놀랄 만큼 팽창한 지금 지난날 광휘로 빛났던 동인천역의 경우 방위가 엇나가 그 이름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난센스' 거리로 돼 버린데다가 한없이 궁색하고 초라하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리움을 부르는 매체라도 될 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흉물이다.

민자 역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신용석 선생은 선친 신태범 박사처럼 경인기차통학생 출신이며 애향심이 강한 분이다.

지난 달 인천일보 칼럼에서 '텅 빈 백화점 건물이 괴물처럼 자리잡고 있고 승객들은 쥐구멍을 찾듯 층계를 오르내리며 전철을 탄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담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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