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우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5.'조선미술의 줏대'를 세우기 위한 궁리
   
▲ '미학과 미적사관'이란 제목의 친필 원고 .


서구 근대 예술학 개방적 참조

'한국미술사학의 태두' 불러 마땅

우리말 형태소 분석 근본의미 고찰

한국인 고유 미술·미의식 정의내려



▲조선미술사의 출현 요망
"내가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의 출현을 요망하기는 소학시대(小學時代)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스스로의 원성(願成)으로 전화(轉化)되기는 대학의 재학 시부터이다. 이래 '창조(創造)의 고(苦)'는 날로 깊어 간다."―「학난(學難)」

이 글은 우현 고유섭의 미발표 초고이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노트 중간에 저자의 교정사항과 함께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씌어 있다. 완성된 원고는 아니나, 저자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현이 '학문하기 어려움〔學難〕'을 토로하는 글은 이어진다.

"동양인의 독특한 미술품에 대한 골동적(骨董的) 태도는 조선의 미술품을, 그리 많지도 못한 유물(遺物)을 은폐시켜, 세상의 광명을, 학문의 광명을 받지 못하게 하는 한편, 무이해(無理解)한 세인(世人)의 백안시적(白眼視的) 태도들은 유물의 산일(散逸)뿐이 아니라 학구적 열정의 포기까지도 조장(助長)하려 한다." <「학난(學難)」'우현 고유섭 전집'『수상 기행 일기 시』, 열화당, 2013, p.26-7>

어디 그뿐인가. 자료수집의 어려움, 방법론적인 고민, 미술사의 배경을 이룰 역사의 토대가 미비한 데서 오는 어려움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우현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땅에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학문이었던 미학·미술사" 분야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힘겹지만 홀로 갔다. 학문적으로 뒤를 잇는 미학·미술사학자 이인범(李仁範)은 우현의 학문적 위상을 이렇게 말하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에서 미학·미술사의 발생은 고유섭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의미는 단지 첫 시작이라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깊고 두터우며 학계의 영향은 뿌리 깊다. 그런 점에서 고유섭은 말 그대로 '한국미술사학의 태두' 혹은 '한국미학의 정초자'라 불러 마땅하며 그에 관한 연구나 논의는 개인사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 자체가 근현대기 한국 미학·미술사계의 성취와 맞닿아 있어서 고유섭에 관한 연구나 그 영향 작용사적 고찰은 사실상 우리 미학·미술사의 기원과 그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인범,「고유섭 해석의 제(諸) 문제」『한국 미학의 선구자 又玄 高裕燮―아무도 가지 않은 길』, 인천문화재단, 2006, p.100.>

또한 <고유섭 연구>(1990년)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임수는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한국미술에 대한 고유섭의 학문적 탐구성과의 전체상은 미학과 미술사학과의 보다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 조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학과 미술평론』은 우현 고유섭의 미학과 비평적 에세이 모음집이다. '우현 고유섭 전집'(이하 '전집'으로 줄임)의 여덟 번째로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30년 경성제국대학 졸업논문인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에서부터 1943년 7월에 집필한 「불교미술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미학론 일곱 편과 미술평론 열여섯 편 모두 스물세 편의 글을 이부(二部) 부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즉 제1부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우현의 깊이 있는 미학론을 엿 볼 수 있고, 제2부는 고대미술·현대미술·건축예술·향토예술·불교미술 등 다양한 주제의 미술 평론 글, 그리고 중국·한국·일본의 몇몇 화가들에 관한 작가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현 고유섭이 남긴 미학과 미술사 관련 글 가운데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1930)이다. 이 글은 우현이 경성제대에서 한국 최초로 미학·미술사를 전공하며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글이지만 친필유고(親筆遺稿)로만 남아 있었고 일문(日文)으로 씌었기 때문에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졸업논문과 관련하여, 1930년 1월12일의 일기에 "졸업논문 청서(淸書)를 마쳤다. 미흡(未洽)하기 짝이 없다"란 내용이 보인다. 어쨌든 우현이 학문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며 쓴 이 글에서 그의 학문에 관한 생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예술활동의 신비한 의미를 은폐하고 있던 모든 음영(陰影)을 없애고, 예술적 활동 속에서 그것과는 전연 다른 인생의 영역의 유익한 효과를 구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언하며, 인식활동(認識活動)의 전진적(前進的) 노작(勞作), 도의적(道義的) 관념의 교화욕구(敎化欲求), 미적(美的) 감수성의 동경(憧憬) 등 모든 정신 욕구에 예술의 전 생명의 가치를 의존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반항하고, 그것을 정복하여, 예술은 예술 자신의 영역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잡다한 성질은 예술의 존립에 대하여 어떠한 이해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비로소 나는 사유(思惟)하고, 의욕(意慾)하며 미적으로 감수(感受)하는 성질과는 전연 다른 것을 예술에서 얻는다. <고유섭,「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 경성제국대학 법무학부 철학과(미학 및 미술사 전공)졸업논문, 1930. 3; 『전집』「미학과 미술평론」, 열화당, 2013, p.71>

이인범은 이 논문에 대해 <해제>에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서구 근대미학의 성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이와 같은 태도는 얼핏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의 개념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흐릿하던 시절,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조선미술사 기술을 꿈꾸며 그가 출사표 같이 쓴 이 글은 눈앞의 당면한 과제를 뒤로 한 채 '예술활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며 이르게 되는 생각이란 점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인범, 「미학과 미술평론」, p.13 >

 

   
▲ 고유섭은 종종 일기장에 글과 함께 그림을 남겼다. 그가 일기장에 남긴 소묘.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학 졸업논문인「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와 첫 기고문인「미학의 사적 개관」이후 '미학'이라는 학명을 표제로 내걸어 쓴 고유섭의 체계적인 글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형태미(形態美)의 구성」(1937), 「현대미(現代美)의 특성」(1940), 「말로의 모방설」(1940)같은 글들은 에세이 성격의 글로서 "미학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으나 '반복' '대칭' '비례' 등 추상적인 형태의 결합원리나 '형식' '모방' '창조' 개념 같은 서구 미학의 성과들을 단편적으로 다루는 정도에서 머물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에 대해 이인범은 "그 대신 고유섭의 미학적 사유는 구체적인 예술현상들, 특히 열정을 쏟았던 조선미술사에 대한 직관과 상호작용 속에 뒤섞이거나 자신의 학문의 방법적 기초 놓기를 위해 채택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사례들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글이「우리의 미술과 공예」(1934)이다. 이 글은 고구려의 고분미술에서 조선시대 미술 공예에 이르는 한국 미술과 공예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머리글에서 우현은 '미(美)'개념, 즉 영어 '뷰티(beauty)', 불어 '보테(beaute)', 독일어 '쇤하이트(Schonheit)', 일본어 '우르와시이(うるわしい)' 등에 견줄 만한 우리말 '아름다움'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말은 미의 본질을 탄력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니, '아름'이라는 것은 '안다'의 변화인 동명사로서 미의 이해작용을 표상하고, '다움'이란 것은 형명사(形名詞)로서 '격(格)' 즉 가치를 말하는 것이니, '사람다움'이란 것은 인간적 가치 즉 인격을 말함이요 '일다움'은 일의 정상(正相)을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지(知)의 정상, 지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이 추상적 형식논리에 그침과 달라서 종합적 생활감정의 이해작용에 근저를 둔 것을 뜻한다. 실로 철학적 오의(奧義)가 심원한 언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아름다움'은 종합적 생활감정의 이해작용이다.그러나 이 생활감정은 시대를 따라 변화되는 것이다. 이곳에 미의 변화상이 있는 것이요 미의 사적(史的) 관찰이 성립되는 것이다. 미술 공예라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요 이러한 종합적 생활감정이 가장 풍부하게 담겨 있는 예술의 일부분이다. <고유섭,「우리의 미술과 공예」『동아일보』, 1934. 10.9-20;『전집』「조선미술사 상」, 열화당, 2007, p.115~116.>

이에 대해 이인범은 "그는 늘 서구 미학을 개방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성과와 방법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동일성과 차이를 밝히며, 그것들을 이 땅의 예술활동을 성찰하고 한국 미학·예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방법적 토대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 "조선미술사의 출현을 요망했다"고백하고 있는 고유섭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고유섭의 자화상.


▲우리의 미의식 고찰
우현의 미학적 연구 성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들은 조선미술과 조선인의 미의식의 특질에 관한 일련의 논고들이다. 「고대인(古代人)의 미의식」(1940)이나 「조선문화의 창조성」(1940),「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1940),「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1941) 등이 그것들이다. 그 가운데서 「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으니, 크게 상상력·구상력의 풍부함을 전제로 삼아 구수한 특질을 조선미술의 미적 특질로 거론하고 있다.

맛에는 두 가지 가 있으니, 즉 '구수한 큰 맛'과 '고수한 작은 맛'이다. 구수한 큰 맛은 "심도(深度)에 있어 입체적으로 온축(蘊蓄) 있는 맛이며 속도에 있어 질속(疾速)과 반대되는 완만한 데서 오는 맛"으로 신라미술에서 현저한 맛인데 거의 조선미술 전반에서 느끼는 맛이기도 하다. 고수한 작은 맛은 "적은 것으로의 응결(凝結)된 감정이자 안으로 동결(凍結)된 응집(凝集)의 풍미(風味)"인데 조선 백자의 색택(色澤)에서 느끼는 맛이다. 구수함은 순박한 온아함이고 고수함은 맵자한 단아함으로 이 두 가지는 "조선예술의 우수한 특색의 하나"이며, 온아와 단아는 멋쟁이가 아닌, 질박(質朴)·담소(淡素)로서 다름 아닌 '무기교의 기교'에 그 뜻이 있다고 했다. 그 뜻이 조선의 공예에 보이며 또한 그것이 일전(一轉)하여 적조미(寂照美)로 나타나는데, "순전히 감각적이요 심리적이요 정서적인 것으로서 조선미술의 커다란 성격의 하나"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수한 성질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미적 특질들의 다른 한편에 상상성ㆍ구상성 등에서 진실한 맛이 없을 때에는 허랑한 '멋'이, 예술적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는 '군짓'과 '거들먹거들먹'하는 부화성(浮華性)이 나오며, "텁텁하고 무디고 어리석고 지더리고 경계 흐리고 … 심하면 체면 없고 뱃심 검은 꼴이 된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는다.

   
▲ 고희동 개인전에 참가한 사람들이 단체로 기념촬영을 했다.(1940.11.) 앞줄 왼쪽부터 장석표, 이해선, 이승만, 최우석, 고희동, 노수현, 이봉영, 이종윤, 이건혁. 뒷줄 왼쪽부터 고흥찬, 이태준, 윤희순, 김규택, 김용준, 길진섭, 임학수, 안석주, 이용우, 고유섭, 전순택.

이러한 특색과 성격에 대하여 우현은 1941년에 발표한 「조선 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라는 글에서 조선미술의 특색을 "기교요 계획이 생활과 분리되기 이전의 것으로, 구성적 생활 그 자체의 생활본능의 양식화"에서 비롯되는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거듭 언급한다.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우현은 그래서 정제성이 부족한 대신 질박(質朴)·둔후(鈍厚)·순진(純眞)한 맛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형태의 파조(跛調)를 통하여 '적요(寂寥)한 유머'를 통해 '어른 같은 아이'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