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로 보는 인천 전국체전
45회 숭의 공설운동장서 첫 개최
1964년부터 올 94회까지 다섯번째

   
1964년 육상경기장에서 열린 제45회 전국체전 개막식. 전국 각지에서 온 관람객과 시민들이 스탠드를 가득 채웠다. 미처 입장하지 못한 이들은 지금의 도원동 광성고등학교 밑 산기슭과 인근 주택 지붕 위에서도 이를 구경했다. 유치원 원생들과 어머니들이 함께 마스게임을 펼치고 있다.

인천에서 민족의 제전인 '전국체전'이 처음 열린 때는 1964년이었다.

제45회 전국체전이 그해 9월3일부터 8일까지 인천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됐다.

앞서 인천시는 기존 인천공설운동장의 야구장과 육상경기장을 대폭 확장하고, 정구장·농구장·국기 게양대·성화대 등을 신설했다.

더불어 시는 도시 전역에서 대대적인 손님맞이 단장에 나섰다.

밤을 새워 시내 곳곳에 아스팔트를 새로 까는가 하면, 가로등과 상가 간판, 교통 표지판 등을 교체했다.

전국체전이 열리는 종합경기장 앞 전도관 일대도 새롭게 치장을 했다.

주변 초가를 모두 형형색색의 신식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인천의 사상 첫 전국체전은 민박 가족의 응원, 무료 숙박 등 '민박 미담(美談)'과 함께 온 시민이 동참하는 범시민적 축제로 승화했다.

대회가 임박하자 환영 아치와 경축 현수막,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입은 각 시·도 선수·임원들의 도착 환영 행사 등으로 축제 분위기가 고조됐다.

1964년 9월3일, 1년여 준비 끝에 막을 올린 전국체전은 3만5000여 관람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도원동과 숭의동 고지대에서도 수많은 시민이 역사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운집한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이 착석하자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6일간 열전 끝에 서울 팀은 223점으로 연승, 193점의 경기도가 2위. 185점의 부산시가 3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인천시는 사상 처음으로 전국체전을 개최하는 귀중한 대회 운영을 경험했으며, 이후 그 노하우를 살려 1978년 10월12일부터 17일까지 제59회 대회, 1983년 10월6일부터 11일까지 제64회 대회, 1999년 10월11일부터 17일까지 제80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렇듯 온 시민이 힘을 모아 성공적으로 치른 대회들은 모두 인천종합경기장(일명 '그라운동장'-영어 '그라운드'와 '운동장'의 이색 합성어)에서 열렸다.

/글·사진·자료 조우성(주필)
 

※ 제45회

사상 최초의 인천 개최 전국체전이었다.

비로 인해 경기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다.

그해 10월10일 동경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어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참가하지 못했으나 의외로 육상과 역도에서 한국 신기록이 각각 1개씩 나왔고, 역도에서 한국 타이 1개, 학생 신기록 2개가 수립됐다.

인천시에서는 민박 가정의 편의를 위해 쌀을 방출미 가격으로 특별 배급했고, 쇠고기, 돼지고기, 계란, 우유 등을 저가로 공급했다.

체전 개막식 때 행하던 본격적인 카드섹션은 그로부터 3년 뒤인 제48회부터였다.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운동장'
 인천은 우리나라 야구와 축구의 도입지이자, 1920년 전국 최초의 '공설운동장'을 설치한 근대체육의 선진지였다. 이는 체육 인천의 위상을 상징한다. 1920년 무렵 웃터골운동장에서 펼쳐진 경기 장면이다.
 


   
 
   인천 각 학교연합대운동회
   1920년대에 각급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연합대운동회'가 온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웃터골에서 열렸다. 그 같은 지역의 운동회가 훗날 '전국체육대회'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렀다. 운동회 날, 인천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고 한다.
  

   
 

 도원동으로 이전한 공설운동장
 1934년 웃터골운동장 자리에 부립 '인천중학교'가 들어서자 인천부는 인천공설운동장을 지금의 도원동 '인천축구전용구장' 위치로 옮겼다. 위 사진은 1968년도 '도원동 야구장' 정문이고, 아래 사진은 겨울철 육상경기장에 마련한 스케이트장 입구 모습이다.
 

   
 

 확장 공사 중인 인천종합경기장
 야구장, 육상경기장, 정구장으로 구성돼 있던 인천공설운동장은 1963년 9월부터 대대적인 확장·보수 공사를 단행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총공사비 8600만원에 연인원 3만2564명이 투입됐다. 종합경기장의 규모는 총 2만2800평이었다.
 

 

   
 

  대회 준비를 끝낸 종합경기장 본부석
 공사를 마치고 대회 직전 본부석 상단에 '제45회 전국대화대회'란 표지판을 내걸었다. 개막식 마스게임 등 예행연습 중 사진이다. 왼쪽 상단의 그늘진 계단에 연습에 참가한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국체전 경축 축하 아치
 시내 곳곳에 전국체전을 축하하는 현수막과 대형 아치가 세워 잔치 분위기가 고조됐다. 인천시청(지금의 중구청 자리) 정문 앞에 키 큰 아치를 세웠고, 본관에는 '정성어린 성금이 전국체전 빛낸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전국체전 경기도예선대회
 전국체전에 참가할 대표 선수를 선발하기 위한 '경기도예선대회'가 매년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사진은 제44회 전국체육대회 경기도예선대회 입장식 광경이다. 아직 운동장 확장 공사를 하기 전이다. (주)대성목재 선수단이 본부석을 지나고 있다.
 

   
 
 
 제45회 전국체전을 기념해 발행된 우표
 정부 체신국은 1964년 9월 3일 개최된 제45회 전국체육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기념우표(평판, 우정마크 무늬, 전지 구성)를 발행했다. '스타트 하는 선수'라는 제목의 이 우표는 모두 100만장이 발행됐다. 사진은 '초일 봉피'이다.
 

 

   
 

 기념 소인을 찍은 우편엽서
 인천에서의 전국체전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인천우체국은 대회 주경기장인 인천종합경기장 안에 임시출장소를 설치하고, 선수ㆍ임원들의 편의를 꾀했다. 기념 소인 치고는 그 크기가 큰 편에 속한다.
 

   
 

 제45회 전국체전 종합안내서
 대한체육회가 1964년에 발행한 전국체육대회 종합안내서이다. 성화를 배경으로 표지가 인상적이다. 스포츠맨 강령, 참가 임원ㆍ선수 명단, 인천 시가도, 심판 규정, 성화 봉송자 명단, 숙박지 일람표, 식장 배치도, 대회 일정표 등이 실려 있다. 총 172쪽이다.
 
   
 

 민족의 성지 강화 마니산 참성단
 1960년대에 촬영한 참성단 전경이다. 전국체전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한 것은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대회 때부터였다. 이상백(李相佰) 제2대 한국IOC위원의 제의로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 전국체전이 벌어지는 주경기장까지 봉송하는 제도가 마련됐다.
 

   
 

 성화 점화
 강화 마니산에서 7선녀들이 채화한 성화는 강화군과 김포군을 거쳐 대회당의 성화대까지 봉송됐다. 모두 59명의 계주자가 3일에 걸쳐 115.6Km의 거리를 달리며 인천체전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최종 주자 최충식 선수가 성화대에 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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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회

정부 수립 30주년을 겸해 기념한 대회였다.

인천종합경기장과 31개 보조경기장에서 1만2000여 임원·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중동에 근로자를 파견했던 시대상을 보여주듯 '재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단'이 참가했다.

성화의 최종 주자는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 수상자인 인천의 장창선 선수였다.

이때 최신 전광판을 새로 설치하고, 관중석도 증축했다.

스와트 얼러 IOC 위원이 참석해 개막식이 마치 올림픽의 축소판이었다고 격찬했다.

경기도 팀(인천 포함)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제59회 전국체전 예행연습 초대권
 전국체전의 하이라이트는 식전·식후에 펼쳐졌던 각종 행사였다. 마스게임과 카드섹션 등이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학생과 교사들이 수개월 동안 동원되는 등 심각한 폐해가 드러나자 이를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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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회

개항 100주년을 맞은 해에 열린 전국체전이다.

축구, 야구의 도입지, 한국 스포츠의 관문에서 민족의 제전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등장한 '과학체전'이기도 했다.

전국 13개 시·도 및 이북 5도와 6개 해외동포 팀을 포함한 1만7548명이 임원·선수가 참가했다.

직할시 승격후 첫 개최이므로 경기장 시설 확충과 경기 운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계양간 기슭에 벨로드룸 경기장에서 사이클경기가 열렸다.

기름을 사용하던 성화대를 가스 연료로 대체해 공해가 없는 새로운 성화가 각광을 받았다.

대회 기간 중 아웅산 폭발 테러가 자행됐으나 조기를 내걸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계속했다.

 

   
 

 제64회 전국체전 교통 안내서
 1983년 체전을 앞두고 경기도경찰국과 도로교통안전협회 경기도지부가 공동으로 발행한 인천 지역 교통 안내서이다. 이 팜프렛에는 숙소 안내, 경기 일정, 경기장 안내도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귀빈 주소록
 체전에 참가한 각 시ㆍ도 지사와 시장을 비롯해 국정자문위원, 교육감, 대학 총장, 신문사 사장 등의 숙소를 게재하고 있다. 숙소는 올림포스 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국제선원호텔, 백제호텔 등 3개였다.
 

   
 
 
 선수단 환영 설탕봉지
 인천 중구 신흥동 소재 제일제당주식회사가 제64회 전국체전을 맞아 자사 제품인 설탕 봉지에 '참가 선수단 환영' 광고를 넣어 시판했다. 다방 등지에서 주로 썼던 7g짜리 흰색 설탕을 담았다.
 

   
 
 
 제64회 전국체전 입장권
 전국체전은 흔치 않은 큰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일반시민들이 체전 입장권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입장권 뒷면에는 지금은 부르지 않는 '애국의 노래' 가사와 입장 안내문이 실려 있다.
 

 

   
 

 화려한 제64회 체전 개회식
 각 시ㆍ도 선수단이 선수단기를 앞세워 입장하고 있다. 본부석 맞은편에서는 수많은 학생이 동원된 가드섹션이 펼쳐지고, 신설된 최신 전광판에서는 개회식을 알리고 있다. 오른쪽 돔 형식 건물이 인천실내체육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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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0회

인천 체육의 이미지와 위상을 한껏 과시한 알뜰 체전이었다.

IMF 이후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손님맞이에 인색하지 않았고, 경기 운영이나 진행에서 완벽에 가까운 체전을 치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수구 동춘동에 로울러 스케이트경기장, 서구 가좌동에 테니스장을 신설했다.

대회 최종일까지 1, 2, 3위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경기도 선수단이 서울과 인천의 추격을 물리치고 지방 사상 최초로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대회에서 인천 선수단은 금 71개, 은 79개, 동 104개 총 245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개막식 마스게임에서는 개최 연도를 가리키는 '2000'의 숫자를 새기고, 인천 발전의 중추가 될 '인천국제공항'을 상징한 대형 항공기 모형을 등장시켜 눈길을 모았다.
 

   
 

 진화된 전국체전 '안내서'
 1999년 9월 인천시 공보관실에서 발행한 체전 안내서이다. 시대적 추세에 따라 '안내서'의 명칭을 '가이드 북'으로 바꾸었고, 과거처럼 별도의 책자를 내지 않고 시 발간 월간지 '내고장 인천(현 '굿모닝 인천'의 전신)'에 일체 사항을 수록했다. 뒷표지는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전국체전 홈페이지가 열렸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제80회 전국체전 전화번호부
 전화번호부를 별도의 소책자로 만들었다. 종별 경기장, 대회 운영본부, 시ㆍ도 본부, 인천지방경찰청 상황실, 대한체육회 숙소, 해외동포 숙소, 응급병원, 언론사 숙소 등이 모두 수록돼 있다.
 

 

   
 

 종합 안내도
 인천시내의 구별(區別) 상세 지도와 경기장의 주변도를 담았다. 더불어 시ㆍ군ㆍ구의 경축 공연행사, 시내 셔틀버스 노선, 알뜰 축제마당, 주요 관광지 안내도가 실려 있다.
 

   
 

 체전 전화 카드
 핸드폰의 급증으로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제80회 전국체전이 열렸던 1999년 무렵만 해도 '전화 카드'는 수집의 대상이 될 만큼 인기를 모았다. 전국체전이 광고로 실린 전화 카드이다.
 

   
 

 제80회 개막식 식전 행사
 중·고생을 동원했던 미스게임 식전행사가 대학생과 전문 예술인들이 출연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1999년 새 천년을 1년 앞둔 시점에서 "희망과 번영의 새 천년을 열자"는 민족적 소망을 담은 대화 슬로건 문구가 보인다.
 

   
 

 각 시ㆍ도 선수단 기의 입장
 개막식에서 선두의 옥천군, 창원시, 포항시, 구례군, 강릉시, 대한펜싱협회, 서울특별시 등을 비롯해 전국 각 시도와 각 협회의 기를 들고 기수들이 힘차게 입장하고 있다. 젊음의 약동하는 힘을 느끼게 한다.
 

   
 

 연합 농악대의 풍물놀이
 부평구 부평 1동, 부개 3동, 십정 2동 등 부평구 풍물놀이패들이 한바탕 신명나게 풍물을 잽히고 있다. 1964년 제45회 대회 때는 상상도 못한 최신형 전광판이 공개행사를 즉석에서 중계해 우리나나가 IT 선진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아듀! 도원동 야구장이여!
 2008년 9월 5일, 도원동 야구장에서는 '남구청장기 쟁탈 초ㆍ중교 야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가 도원동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 대회에서 상인천초교와 대헌중이 각각 인천 유소년 야구 최강자에 올랐다. 그 후 야구장은 헐려 도원동 야구 전성시대를 마감했다.
 

   
 
 
 인천종합경기장의 마지막 자태
 4차례에 걸쳐 전국체전이 열렸던 인천종합경기장의 야구장, 육상경기장의 마지막 모습이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인천축구전용구장'으로 들어서 인천의 새로운 축구사를 써나가고 있다. 이번 제94회 전국체전은 인천사의 정기가 서려 있는 '문학경기장'에서 열린다.